수정궁 1- 탄생과 소멸

입력
2021.11.30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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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0 수정궁

1851년 영국 빅토리아 왕실이 개최한 런던 만국박람회(Great Exhibition)는 그 자체로 역사이면서 이정표였다. 17세기 이래 산업혁명의 성취를 한데 모아, 18세기 열강의 제국주의에 기반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압도적 우위를 과시하며, 세계를 장악한 제국 절정의 위상을 선포한 무대라는 점에서 그러했다.

박람회에는 전 세계 1만4,000여 국가와 기업 등이 출품한 10만여 점의 진귀한 전시품들, 예컨대 거대 수압프레스에서부터 훗날 빅토리아 여왕의 왕관을 장식한 108캐럿짜리 다이아몬드 '코이누르(Koh-i Noor, 빛의 산)' 등은 세계인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았다. 비싼 입장료(개막 첫 주 1파운드)에도 불구하고 관람객이 쇄도해 왕실과 주최 측은 18만6,000파운드(근년 기준 약 2,000만 파운드)의 수익을 남겼다.

하지만 박람회의 압권은 전시장, 즉 조경가 겸 건축가 조지프 팩스턴이 설계한 '수정궁(Christal Palace)'이었다. 행사 직전인 1850년 1월에야 출범한 조직위는 전시장 설계를 서둘러 공모하며 최대한 빨리 단순하고 경제적인 건물이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런던 하이드파크에 들어설 전시장은 행사 직후 철거돼야 했다. 출품작은 모두 245점. 그중 조건을 충족시킨 것은 팩스턴의 설계가 거의 유일했다. 약 5톤의 주철 빔과 30만 장의 판유리로 단 7개월 만에 조립된, 가로 563m 세로 139m 높이 41m 규모의 온실 같은 수정궁은, 자연광으로 안팎이 수정처럼 찬란한 빛의 전당이자, 근대의 상징이 됐다.

박람회 후 남런던 시드넘(Sydenham)으로 해체 이전돼 전시장과 공연장, 연회장 등을 갖춘 복합건물로 변신한 수정궁은 1936년 11월 30일 화재로 전소됐다. 당시 보수당 정치인 윈스턴 처칠이 불에 휩싸인 수정궁을 보며 "한 시대가 끝났다"고 했지만, 그건 절반만 유효한 진단이었다. 그는 파괴를 생산의 주요 과정으로 포섭한 자본주의 메커니즘을 얕봤다.

최윤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