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수장애인 김형희(52)씨는 지난해 국가건강검진을 받기 위해 경기 안양시 소재 종합병원 건강검진센터를 찾았다가 여러 차례 고역을 치렀다. 유방암 검사실에선 촬영 기기가 휠체어 높이까지 내려오지 않아 전신마비인 김씨는 기기에 몸을 댈 수가 없었다. 직원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킨 채 40분간 씨름하던 김씨는 결국 "어차피 (촬영을 해도) 제대로 찍히지 않을 것 같다"는 직원의 말에 중도 포기했다. 청력검사는 비좁은 검사실에 휠체어가 들어가지 못해 관뒀다. 김씨는 "남들에겐 당연한 검진도 내가 겪을 까다로운 과정을 생각하면 꺼리게 된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장애인건강권법이 제정돼 국가 차원에서 장애인에게 맞춤형 건강검진 서비스를 제공하겠다고 공언한 지 4년이 지났지만, 현장에선 여전히 "간단한 검진조차 받기 어렵다"는 장애인들의 호소가 끊이지 않고 있다. 정부는 장애인 전문 검진기관을 내년까지 100곳으로 늘린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지금까지 서비스가 개시된 기관은 7곳에 불과한 데다 참여 여부도 자율에 맡기고 있어 목표 달성은 요원한 상태다. 이 때문에 장애인권 단체를 중심으로 "현행 장애인건강권법은 선언에 불과하다"며 실효성 있는 대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28일 한국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장애 특성을 고려한 건강검진 장비와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취지로 정부가 '장애친화 건강검진기관'으로 지정한 곳은 이날 기준 19곳이고 이 가운데 실제 요건을 갖춰 운영되고 있는 곳은 7곳뿐이다. 국가가 '장애인 건강검진기관'을 지정 운영한다는 조항이 포함된 장애인건강권법이 2017년 제정되고, 보건복지부가 이를 근거로 2018~2022년 전국에 장애친화 검진기관 100곳을 지정하겠다는 사업 목표를 제시한 것이 무색한 상황이다. 복지부 관계자는 "기관 지정이 공모로 진행되는데 신청 병원이 너무 적어 지난해엔 6차까지 재공모를 했다"고 말했다.
장애인 검진기관에 지정되면 정부로부터 지원금 1억3,800만 원을 받는다. 의료업계에선 임무 수행에 필요한 시설 보수 및 인력 증원 비용을 감안하면 정부 지원이 한참 부족하다고 평가한다. 서울 소재 의료기관 관계자는 "장애인은 검진 속도가 비장애인보다 대여섯 배 느리고 별도 인력을 따로 붙여야 하기 때문에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고 했다. 장애친화 검진기관으로 지정된 부산의 사립 의료기관 관계자도 "시설이나 장비뿐 아니라 통역 및 부축 인력 등 신경 쓸 부분이 많은데도 정부 지원은 한정적이라 참여 유인책이 되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각종 질환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장애인들이 이런 상황 탓에 건강검진을 소홀히 하면서 병을 키우는 사례도 적지 않다. 김형희씨는 "같은 장애를 갖고 있는 지인이 검사를 미루다 2년 전 대장암 말기 진단을 받고 두 달 만에 생을 마감했다"고 전했다. 척수장애인은 배변이 원활하지 않아 대장암 발병 위험이 높지만, 일반적인 진단검사를 받으려면 화장실을 여러 번 드나들어야 하는 등 감당하기 힘든 불편이 따른다. 척수장애인 장애경(52)씨는 "다른 검사는 다 받아봤지만 대장암 검사는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장애인권 단체들은 현재 공모제인 장애친화 검진기관 지정 방식부터 의무제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성연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사무국장은 "장애인은 비장애인보다 각종 건강검진을 자주 받을 필요가 있다"며 "정부가 공공병원을 중심으로 장애친화 검진기관을 의무 지정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서울 소재 공공의료기관 관계자는 "정부가 직접 장애인 전담 검진병원을 만들어 책임 있게 운영하는 방법도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