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년 12월1일 미군 장갑차 여중생 사망 사건 대규모 촛불 시위

입력
2021.12.01 05:30
2002년 12월 1일 
반미 기류 각계 확산…SOFA 근본적 변화는 아직

편집자주

한국일보 DB 속 그날의 이야기. 1954년 6월 9일부터 오늘날까지, 한국일보 신문과 자료 사진을 통해 '과거의 오늘'을 돌아봅니다.


'사람 죽이고 무슨 배짱인가' 2002년 7월 1일 한국일보 사설은 그해 6월 13일 발생한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사망 사건에 대한 미군 측의 무성의한 태도를 이렇게 질타했다.

2002년 6월 13일 오전 10시 45분께 경기 양주군 56번 지방도로에서 조양중 2년 신효순(14), 심미선(14) 학생이 미2사단 공병대 소속 장갑차에 깔려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당시 미군 측은 "장갑차 운전석은 오른쪽이 잘 안 보여 조수석 탑승자가 운정병을 보조한다"며 "30m 전방에 행인이 있다는 보조자의 경고를 운전자가 알아듣지 못해 사고가 발생했다"고 해명했다.

이후 미군 측은 주한 미8군 사령부 군사법원에서 11월 20일과 22일 관제병 페르난도 니노 병장과 운전병 마크 워커 병장에게 각각 무죄 평결을 내린다. 두 명의 여중생이 사망했지만 가해자는 없고,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기이한 결론이 났다.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에 의하면 '공무 중의 범죄'에 대해 미군이 1차 재판관할권을 갖기 때문에 한국은 장갑차의 운전자 등에 대해 아무런 형사책임을 물을 수 없었다. "운전자의 책임이 없다"는 미군 당국자의 발언은 '처벌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들려 우리 국민의 감정을 자극했고 일반 국민에까지 반미감정이 확산됐다.

12월 1일, 그해 한일월드컵으로 환희의 "붉은 물결"이였던 광화문 일대가 6개월 만에 미군 장갑차에 숨진 두 여중생의 넋을 위로하는 촛불로 물든다. 반미감정은 방송, 연예계로 번졌다. 항의 시위는 전국에서 계속됐다.

12월 13일 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깊은 애도와 유감(deep sadness and regret)을 전달한다"면서 직접 사과의 뜻을 표시하고 "유사 사건의 재발 방지를 위해 미군 수뇌부로 하여금 한국 측과 긴밀히 협조하도록 지시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은 운영방안 개선만 있었을 뿐 근본적인 변화 없이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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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성 기자
자료조사 = 김지오 DB콘텐츠팀 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