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잡식성 동물이다. 그런데 인류사의 99% 이상은, 95% 이상 식물성 음식으로 살아왔다. 동물성 식료도 그나마 뭍짐승보다는 벌레나 동물을 잡아먹었다. 사냥은 사실 쉽게 잡으면 수지가 맞지만, 위험하기도 하고 에너지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 초기에는 다른 맹수류 짐승이 먹고 난 찌꺼기들을 먹는 소위 '시체청소부' 역할을 했다고 인류학자들은 설명한다.
그런데 인류가 진화하고 시대가 흘러 지금으로부터 1만8,000년 전 무렵, 기후온난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얼음이 녹아 바닷물이 밀려오게 되니까, 인간은 살던 곳을 버리고 계속해서 내륙으로 쫓겨들어가게 되었다.
그 난리 중에서도 한 가지 좋은 점이 있었다. 바로 주방혁명, 먹거리 혁명이다. 토기가 발명되면서 음식을 끓일 수 있게 되자 아이들을 위한 이유식을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해산물이 마침내 중요한 식단이 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영양분 섭취가 확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한반도에서도 이러한 먹거리 혁명의 변화 과정을 엿볼 수 있는 곳이 2004년 발굴돼 국가사적 486호로 지정되었다. 8,000년 전부터 먹거리를 장만했던 현장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경상남도 창녕 비봉리의 신석기시대 패총 유적이다.
구마고속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창녕을 지나 영산포IC를 내려오니, 온천으로 유명한 부곡으로 가는 간판이 보인다. 창녕에 내려서 진흥왕 창녕비와 송이라는 여인이 있는 고분공원도 보고 싶었지만, 다음을 기약하고 달렸다. 부곡을 지나고 얼마 되지 않아 '비봉리 유적'이라 표시된 간판이 나타나고 금세 작은 전시관이 보인다. 건물 외벽에 그려진 그림이 없었다면 유적전시관임을 알아보기도 힘든 평범한 네모난 건물이다. 아침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지나다니는 차도 없고 사방이 조용해서 이제 막 강해지는 햇살이 나뭇잎을 때리는 듯한 소리가 들릴 지경이다.
전시관은 서편의 작은 산에서 내려오는 골짜기가 청도천(淸道川)과 합수하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 주차장에서 골짜기 아래쪽이 내려다보이는 작은 잔디밭에 멧돼지와 사슴 모형을 세워놓았다. ‘아 바로 저기가 발굴 지점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사시대 유적이라서 지상의 구조물은 남은 것이 없으니 그렇게라도 표시를 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건물 옆면에 멧돼지 모습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이 멧돼지는 이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의 표면을 캔버스로 하여 음각선문으로 그린 비봉 여인의 ‘작품’이다. 희귀한 신석기시대 미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봉리의 트레이드마크가 멧돼지 그림이지만 널리 알려진 발견은 바로 갯벌 속에 남아 있던 당시의 배의 파편이다. 배는 통나무 속을 파내어 만든 것인데, 당시에는 판자를 만들 수 있는 도구나 기술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카누처럼 생긴 통나무배나 뗏목을 만들었다. 큼직한 나무를 베어서 속을 불태워가면서 파내 사람이 탈 자리를 만든 것인데 남아 있는 나무 파편은 납작한 모습을 하고 있다.
비봉리에서는 배와 함께 노가 발견되었는데 약간 휘어진 모양을 하고 있다. 배의 파편은 서울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지만, 이곳 박물관에는 복원된 배가 전시되어 있다. 이 배는 지금으로부터 8,0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일본에서 발굴된 배보다도 2,000년 정도 앞선다.
전시관 안에는 비봉리 유적의 층위를 발굴 구덩이처럼 만들어 전시하고 있는데 시대를 달리하는 유적의 층위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층서(層序·지층이 쌓인 순서)의 아랫부분에는 바다에 사는 규조류(플랑크톤처럼 물에 떠서 사는 미생물)가 압도적으로 나타나서 바닷물이 이곳까지 들어온 것을 알 수 있다. 이 유적에서 가장 오래된 시기인 8,000년 전경(頃)은 바다의 수면이 오늘날의 높이에 도달한 시기이니, 멀리 떨어진 남해바다 강변에 살았던 사람들이 여기까지 밀려온 셈이다. 사람들은 창녕이 경남 내륙의 도시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신석기시대 이른 시기에 해수면이 높아질 때에는 이곳까지 바닷물이 밀려왔던 모양이다. 썰물에 배를 타고 해안가로 나가면, 밀물에는 쉽게 이곳까지 돌아올 수도 있었으리라.
비봉리의 바로 앞에도 대단히 넓은 갯벌이 연결되어 있었을 터이지만 지금은 간척 작업으로 청도천의 양쪽을 긴 제방으로 물을 막고 농사를 짓고 있다. 비봉리 유적이 자리한 지점이 제방으로 청도천과 분리되자 물을 퍼내는 양수펌프장을 만들기 위해 땅을 파면서 유적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됐다.
우리나라 대부분 유적에선 동물뼈나 식물의 흔적이 발견되는 경우가 드물다. 땅에 산소 공급이 원활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서 빠르게 산화돼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산소가 닿기 힘든 물 속이나 갯벌층에서는 유기물로 된 유물이 남아 있다. 비봉리에서도 갯벌층 속에 동물뼈, 씨앗, 곡물, 나무 등 유물이 많이 남아 있어 당시 사람들의 먹거리를 짐작하게 한다.
비봉리유적에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도토리이다. 불에 탄 도토리는 신석기유적에서 심심치 않게 발견되는데, 이곳에서는 구덩이에서 대량으로 발견되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아마도 구덩이에 가득 채워 넣고 그 위에 나뭇잎을 덮었던 것으로 보인다. 발굴을 담당하였던 임학종 김해박물관 전 관장은 도토리에 들어 있는 쓴맛의 타닌을 없애기 위해서 만조 시에 들어오는 바닷물을 채워 넣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유적의 저장구덩이 안에서 갈돌과 제분된 가루가 보이고 또한 큼직한 토기가 발굴된 것으로 보아, 도토리묵을 만들었다고 상상해도 될 것 같다. 도토리가 선사시대에 중요한 식료자원이었음은 전 세계에서 확인되지만, 묵은 오늘날 한국에만 남아 있는 특별한 음식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발굴된 개뼈에서 바다에서 오는 식료들을 섭취한 흔적이 동위원소과학분석에서 나타났는데 개가 사람들과 같은 종류의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고 볼 수 있다. 유적에서는 낙동강하구에서 많이 채집되던 재첩 종류의 조개가 있는 한편, 바닷속의 바위에 서식한 소라나 굴, 가오리처럼 바다에서 서식하는 종들이 발견되는데 분명 이 일대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배를 타고 멀리 잡으러 나갔거나 해안 지역의 사람들과 물물교환을 했을 것으로 상상할 수 있다. 한편 팥과 같은 잡곡류 곡물의 흔적들이 토기에 찍힌 흔적이나 탄화물로 발견되고 있어 비봉리 사람들의 상차림이 오늘날 서울의 백반집에서 보는 것보다 나을 것 같기도 하다.
비봉리 유적에서 발굴된 토기들은 출토된 층위에 따라서 시대가 다를 수는 있지만 토기띠를 붙인 것도 있고 누른 문양, 그은 문양 등 다양한 기법과 함께 디자인 역시 다채롭다. 멧돼지 그림과 같이 기하학적인 음각선으로 된 것도 있고 또 특이한 것은 붉은 산화철로 껍질을 마연하여 표면을 문양 장식한 것도 있다.
그런데 토기 장식을 볼 때마다 머리 속에는 그것을 만든 여인네들의 손이 떠오르는데, 왜 한동네에서 이렇게 다양한 모습의 토기가 나오는 것인지 의문이다. 친정어머니에게서 배운 대로 하는 경우도 있었겠지만 시누이 올케가 사이좋게 의논하면서 새로운 장식을 고안하기도 했을 것이다. 아직도 우리나라에는 젠더(Gender·성별)고고학이 별로 발전되지 않았다. 비봉리 토기의 다양한 모습에 그저 당시 여인네들의 생각을 이리저리 짐작할 따름이다. 결국 집안 분위기를 단조롭지 않게 만들려는 의도를 상상할 수 있고, 음식을 먹을 때 사용하는 작은 그릇들도 상(床)자리 분위기를 즐겁게 하려는 의도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국가가 사적으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작은 전시관이나마 만든 것은 다행이지만, 한편으로는 빙하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환경의 도전에 놓였던 한반도 선주민들의 진보하는 문화를 담은 유산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이 너무 적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지구온난화로 기후이변이 이어지는 이 시대에, 자연을 조화롭게 이용하여 오늘날까지 인류를 번성하게 만든 신석기시대 초기 인간승리의 현장에 우리가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미래사회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과거의 그곳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이번 고고학여행에서 느끼는 아쉬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