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티켓 예매가 시작된 지 25분 만에 전석 매진 됐다는 리사이틀답게 22일 서울 신천동 롯데콘서트홀의 객석은 관객들로 빼곡했다. 야구장으로 치면 외야석에 해당하는, 평소였으면 듬성듬성 비워져 있었을 합창석 객석도 가득찼고, 공연을 감상하기가 비교적 불편한 2층 객석까지 모두 인파로 붐볐다.
이날 관객 1,600여명은 오직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치열한 예매 경쟁을 뚫고 그 자리에 있었다. 주인공은 러시아 출신의 '피아노 황제' 예프게니 키신이었다. 최근 안드라스 쉬프 등 굵직한 거장 피아니스트들의 내한공연이 잇달아 취소된 가운데 키신의 리사이틀은 클래식 팬들에게는 놓칠 수 없는 올해 주요 공연 중 하나였다. 키신의 리사이틀은 3년 만이다.
이날 리사이틀 프로그램은 바흐와 모차르트, 베토벤을 거쳐 쇼팽으로 마무리되는 구성이었다. 바로크부터 고전, 낭만을 대표하는 작곡가들의 곡으로 짜인 덕분에 서양 음악사를 압축한 것처럼 보였다.
힘찬 박수를 받으며 무대로 입장한 키신은 건반 앞에 앉자마자 다소 긴박하게 첫 곡이었던 토카타와 푸가 D단조(BWV 565)의 첫 음을 눌렀다. 이윽고 바흐 특유의 촘촘한 구조가 전개됐다. 타건을 하는 동안 연신 끄덕였던 키신의 머리는 대위법을 따라가며 박자와 악센트를 정확하게 지키고 있었다. 빈틈 없는 연주였다. 게다가 이 곡은 원래 오르간을 위한 작품으로 쓰였다. 때문에 키신은 피아노의 울림을 극대화 하는데 신경을 쓴 것으로 보였다. 저음부의 패시지에서 두드러졌는데, 자칫 음이 뭉개져서 들릴 정도였지만 파이프 오르간의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실제로 리사이틀이 열렸던 롯데홀은 국내 최대의 파이프 오르간이 있는, 울림이 풍성한 클래식 공연장이다. 키신은 바흐가 정립한 규칙과 구조를 지키면서도 자신만의 해석을 들려줬다. 분명 바로크 곡이었지만 주법과 호흡은 낭만적이었고 자유분방했다.
두 번째 곡이었던 모차르트의 아다지오 B단조(K. 540)는 모차르트의 곡이라고는 드물게 단조로 쓰인 서정성이 강한 작품이었다. 실제로 키신은 굉장히 침착한 템포로 아다지오를 해석했다. 분명 제목은 아다지오였지만 체감되는 템포는 라르고나 렌토 수준이었다. 다소 장대하게 시작한 첫 곡과 분위기가 대비되면서 모차르트의 아다지오는 애수를 자아냈다. 키신은 음표 하나하나의 맑은 표현에 주력하는 모습이었다.
1부의 마지막 곡이었던 베토벤 소나타 31번은 '노래'를 주제로 만든 작품답게 한 편의 발라드 가요를 듣는 듯한 인상을 남겼다. A♭장조의 곡이었지만 1부의 전반적인 흐름과 어울리는 차분한 소나타였다.
인터미션이 끝나고 이날 공연의 주요 레퍼토리였던 쇼팽의 마주르카와 폴로네즈가 본격 연주됐다. 2부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대조'였다. 쇼팽의 해석에서 정평이 나 있는 키신은 이날 마주르카(Op. 7, 24, 30, 33) 7곡을 들고 왔다. 각 마주르카는 장조와 단조를 한 번씩 번갈아 연주되며 극적 대비를 이뤘다. 게다가 개별 곡에서도 프레이즈의 완급조절이 일품이었다. 발레 토슈즈 끝으로 사뿐사뿐 딛는 듯한 우아함이 나오다가 갑작스레 폴카풍의 박력 넘치는 춤사위가 전개되는 식이었다. 이러한 다이나믹의 교차가 객석을 긴장시켰다.
마지막 곡이었던 '안단테 스피아나토와 화려한 대 폴로네즈(Op. 22)' 또한 곡 제목처럼 차분한 '안단테 스피아나토'와 열정적인 '대 폴로네즈'로 구성돼 전반부와 후반부의 대조가 이뤄졌다. 침착하게 진행되던 선율은 호른의 팡파르를 표현한 키신의 격동적인 화음을 분기점 삼아 폴로네즈로 넘어가며 축제의 장으로 변했다. 객석에 앉아 조심히 발끝으로 박자를 맞추거나 손가락을 까닥거렸을 관객이 적지 않았을 것으로 보였다.
모든 연주가 끝나고 키신이 뜨거운 커튼콜을 받으며 무대로 입장했을 때 관객들은 생각했을 것이다. 프로그램북에는 쓰여있지 않은 '3부 공연'이 지금 막 시작될 것이라고. 키신은 앙코르가 후한 연주자로 유명하다. 이날도 그의 앙코르가 과연 얼마나 나올지 기대에 찬 관객들이 대다수였다. 실제로 키신은 정규 공연이 끝난 뒤에도 무려 40여분간 앙코르 연주를 했다. 바흐의 코랄 프렐류드 '어서 오소서, 이방인의 구세주여'(BWV 659)와 모차르트의 론도 1번, 쇼팽 스케르초 2번과 왈츠 12번을 들려줬는데, 이날 프로그램 구성과 유사한 구조였다.
끝나는 듯 끝나지 않는 앙코르를 들으며 관객들은 행복감을 감추지 못했다. 도대체 몇 번의 커튼콜을 받았는지 세는 것을 포기할 때쯤 키신이 무대에서 퇴장했다. 연주를 마친 키신은 만족스러운 듯 웃고 있었지만, 차분한 미소였다. 이날 레퍼토리를 닮은 표정이었다. 마지막 앙코르가 끝났을 때 관객들은 대부분 자리에서 기립해 공연장이 떠나가도록 박수를 쳤다. 감동을 주체하지 못하고 함성을 지르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코로나19의 방역수칙을 생각하면 삼가야 할 행동들이었지만 이날 공연의 열기를 생각하면 용서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