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죽음엔 애도가 쉽사리 따르지 않는다. ‘대체 왜?’라는 물음에 사로잡혀, 산 자는 망자의 죽음 그 순간에 머무른다. ‘만약에’라는 가정으로 수없이 친 가슴엔, 결국 ‘그렇게 될 때까지 나는 무엇을 했나’란 죄의식이 들어찬다. 그렇게 자신을 기어이 그 죽음의 기여자로 만든다. 가족을 자살로 잃은 자살 사별자들이 그렇다.
그들이 겪는 죄책감의 시간은 대개 홀로여서 더 가혹하다. 누구에게도 섣불리 털어놓지 못하는 마음은 채 슬픔으로 자랄 새 없이 심연에 갇혀 버린다. 빗장 너머의 응어리가 언제 삶을 송두리째 흔들지도 모르고.
그래서, 어떤 애도엔 인도자가 필요하다. 애도에 이르기까지 손잡아줄 사람, 마음을 들어줄 사람, 고인을 함께 기억해줄 사람. 임상심리학 박사 고선규(46) 마인드웍스 심리상담 대표는 그 일을 하는 사람이다. 4년째 자살 사별자들의 애도 상담을 하고 있다. 자살 사별자들에게는 고인과 고인의 자살 얘기를 편견 없이 들어주고, 지지해줄 ‘안전한’ 관계의 사람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가 애도 상담을 하게 된 건 심리부검이 계기였다. 심리부검은 고인의 글, 가족ㆍ지인 면담을 바탕으로 자살에 이르기까지 심리를 파악해보는 시도다. 자살은 사유가 명확한 사망과 달리, 심리부검 외에는 이유를 추정할 방법이 없다. 그런 노력을 해도, 물론 그건 짐작에 지나지 않는다.
그게 남은 이들을 괴롭힌다. ‘왜?’라는 물음표에서 삶은 맴돈다.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니 애도 또한 할 수가 없다. 심리부검 면담은 고인과 관련된 정보를 얻는 게 목적이지만, 고 박사가 면담에서 만난 유가족은 ‘팩트’를 말하기보다 자신들의 힘든 마음을 말하고 싶어했다.
“고인의 죽음에 인생이 완전히 저당잡혀 거기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집단이 있어요. 세월호 참사나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유가족이 그렇죠. 자살 사별자들도 마찬가지예요. 이런 외상적 사별을 겪은 이들에게는 전문적인 도움이 필요하다는 걸 그때 실감했죠.”
중앙심리부검센터를 나온 이후인 2018년 그는 애도 상담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애도 상담을 하면서 또 하나 깨달은 게 있다. 자살 사별자들에게 전문적 도움을 전문가만 줄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것. 같은 경험을 한 자살 사별자들끼리의 위로와 연결은 그 어떤 전문가의 말보다 큰 힘을 지녔다. 자살 사별자 자조모임을 병행하게 된 이유다.
최근 그가 펴낸 책 ‘여섯 밤의 애도(한겨레출판)’는 ‘마인드 피크닉’이라는 이름으로 모인 자살 사별자 5인의 자조모임을 압축한 책이다. 자살 사별자들이 털어놓는 심경과 경험, 모임을 하는 동안 있었던 변화가 기록돼있고, 이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고 박사가 풀어준다. 그는 그러니까 기록자이자, 상담자, 해설자로서 책을 엮었다.
자살 사별자들이 충분한 애도로 가는 여정에서 그들의 슬픔을 함께 지는 이, 고 박사를 19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사에서 만났다.
-심리학자가 된 이유가 있나요.
“어릴 때부터 사람들 얘기 듣는 걸 좋아했어요. 라디오 사연부터, 주변 어른들 얘기까지요. 사람의 마음이 늘 궁금했나 봐요. 그러니 귀결이 심리학이었죠.”
-미국에서 포닥(박사후 과정)까지 했으니 심리학 공부가 재미있었나 봐요.
“음, (미소) 제게 성취지향인 면이 있어요. 심리학을 선택한 이상 승부를 보자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애도 상담을 하지만, 박사할 때만 해도 에이징(노화) 특히 정서적 노화에 관심이 있었어요. 제가 했던 심리부검 면담이나 애도 상담과 연결 지어 보면 끝, 쇠락, 상실 이런 데에 원래 관심이 있었구나 싶어요.”
-2014년부터 중앙심리부검센터에서 3년간 근무했죠.
“보건복지부 제의로 참여했어요. 중앙심리부검센터를 만들 때 기반 닦는 일부터 시작해서 부센터장까지 했죠. 그때 처음 자살 사망자 심리부검을 했어요. 자살자 유가족 중에 심리부검에 응한 유족을 상대로 해요. 많은 선행 연구를 통해 자살 위험 요인으로 밝혀진 항목을 바탕으로 심리부검 면담 도구도 설계했죠. 유가족의 입을 통해 고인의 정보를 들어서 자살 사망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게 목적이고요. 그러니 심리부검 면담 시간이나 물어야 하는 질문이 정해져 있어요.”
-자살 사망자 유가족 면담은 특수성이 있을 것 같아요.
“맞아요. 심리부검 면담을 할 때도 고인의 얘기를 전하는 유가족의 마음 상태가 정말 중요해요. 이걸 케어하면서 면담을 해야 하니까 상담자의 숙련도가 필요한 작업이죠.”
-심리학자로서 심리부검은 그때가 처음이라고 했는데, 어땠나요.
“심리학이 공공의 영역에서도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걸 알았죠. 힘들었지만, 그래서 보람이 있었어요. 심리부검 면담으로 다양한 연령대와 직업군을 만난 것도 도움이 됐고요. 심리학자는 아주 개인적인 것, 내적인 것에 천착하기 마련이라 사회를 거시적으로 볼 기회가 드문데, 심리부검을 하면서 시야가 넓어졌죠.”
-애도 상담은 그럼 어떻게 하게 된 건가요.
“중앙심리부검센터를 그만둔 뒤 1년쯤 쉬었어요. 회복 시간이 필요하더라고요. 진이 빠질 정도로 너무 열심히 일했거든요. 그 시기 자살 사별자들에게 애도 상담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심리부검을 할 때 실제 일부 유가족은 면담이 끝난 후 저와 상담을 하고 싶다면서 따로 연락을 해온 경우가 있었거든요. 그게 마음에 남은 거죠.”
-쉬는 동안 자살 사별자들이 떠오른 거군요.
“맞아요. 그래서 애도 상담 관련 연구나 책, 소설, 영화를 엄청 찾아 봤어요. 세월호 참사나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같은 사건으로 외상적 사별을 겪은 유가족의 심리 지원에 사회적으로 관심이 생겼지만, 그전까지 통상 정신의학이나 심리학에선 애도나 상실을 전문적으로 다루진 않았어요. 애도라는 건 죽음 이후 따르는 과업이자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회복되는 삶의 경험으로 여겼고, 그러니 심리적 개입이 필요한 대상으로 보지 않은 거죠. 그런데 외상적 사별을 겪은 이들은 그렇지가 않았던 거예요. ‘알고 보니 그 죽음에 나머지 인생이 완전히 저당잡혀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집단이 있더라. 그렇다면 그들에게 전문적인 도움이 필요하다’는 논의가 시작된 지가 얼마 되지 않았어요. 자살 사별자들도 그에 포함되고요.”
-‘애도 상담’이란 개념은 심리학에 원래 있는 건가요.
“맞아요. 그리프 카운셀링(Grief Counseling)이라는 용어가 있죠. 더 건강하게 애도할 수 있게 도와주는 상담이에요.”
-애도 상담 중에서도 자살 사별자들을 떼내어 한 거군요. 자살 사별과 다른 사별의 차이가 있어서일 텐데요.
“다른 사별은 적어도 죽음이 왜 일어났는지를 알아요. 사고나 질병처럼. 그런데 자살 사별은 다 추정일 뿐이죠. ‘왜’라는 물음에 확실한 답을 얻을 수가 없어요. 죽음의 이유를 알 수 없는 거죠. 이것이 애도에 주는 영향이 어마어마하게 커요. 화가 나기도 하고, 특정인을 탓하기도 하고, 내 탓을 하기도 하죠. 그런 감정들이 애도를 굉장히 복잡하고 어렵게 만들어요. 애도 이론의 첫째가 ‘그 죽음을 인정하라’거든요. 고인의 존재가 물리적으로 사라진 걸 인정하라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이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자살 사별은 죽음의 이유를 모르니 인정하기가 힘들죠. 그 산을 넘는 게 가장 고된 일이에요. 거기다 자살로 누구를 잃었다고 말하기 어려운 한국 사회의 특성도 영향을 미치죠. 그러니 사별 반응도 겪기가 어렵고요. 외면하거나, 빨리 잊고 싶어하는 반응도 보이죠. 누군가를 잃으면 일단 너무 슬퍼해야 하는데, 이런 이유들로 슬퍼하지를 못하는 거예요.”
그러니 자살 사별자들은 자기 안에서도, 밖에서도 전쟁을 치른다.
-‘여섯 밤의 애도’를 보니, 애도 상담이나 자조모임을 고인을 잃은 그날에서 시작하더군요.
“사별자들은 대개 그날의 일을 아무하고도 얘기하지 않거든요. 그런데 사별자들에겐 그날 특정한 순간의 신체 감촉이나 이미지까지도 각인돼있어요. 그때의 일을 떠올리면서 어떤 감정이 들었는지, 뭐가 불편했는지 거슬러 올라가 생각해 보는 게 중요해요. 그래서 고인의 사망 소식을 언제, 어떻게 들었고, 그때 어떤 느낌이었는지 그것에서부터 시작하죠.”
그날에서 출발해, 자살 사별자들은 장례식, 고인의 사망에 대한 법적ㆍ행정적 처리, 유품 정리, 첫 기일까지 자연스럽게 되짚어 간다.
-자살 사별자들이 고인의 죽음을 ‘자살’이라는 단어로 말하게 되기까지의 시간, 또 그렇게 말하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나요.
“말을 하지 않으면 더 무거워지거든요. 애도 과정을 쭉 겪고 나면 종국에는 자살도 그냥 죽음, 죽음의 한 방법으로 받아들이게 돼요. 그렇게 되면 죄책감도 해소되더라고요. 사별 직후엔 자살에 방점이 너무 크게 찍히거든요. 검은 상자에 넣어 밀봉해야 할 것 같은 무게감에 압도되기도 하고요. 그런데 애도 과정을 겪으면서 사별자들이 해야 하는 건 죽음이라는 고인의 끝이 아니라 삶을 기억하는 거예요. 자조모임에 와서 누군가를 자살로 잃었다는 말을 하면 할수록, 그렇다고 절대 대수롭지 않은 일이 되는 건 아니지만, 내 삶을 짓누르지는 않게 돼요.”
-통상의 대인 관계에서도 말하는 게 필요할까요.
“일상적인 대인 관계에선 그렇게 구체적으로 말할 필요는 없죠. 유가족이 먼저 말하기 전까진 물어서도 안 되고요. 하지만, 나를 진심으로 위로하고 지지해줄 사람들에게는 공유하는 게 좋아요. 단 한 명이라도 괜찮아요. 내게 중요한 사람, 내가 안전하게 위로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해요.”
-자살 사별자들이 진짜 고인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순간은 언제일까요.
“슬퍼할 때죠. 그런데 온전히 슬퍼할 수 있게 되기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요. 이 죽음이 파악이 안 돼서 슬픔보다 분노, 혼란, 고통 같은 감정이 더 크죠. 원인을 제공한 상대와 싸워야 할 것 같기도 하고요. 죄책감, 후회, 원망, 자책 이런 게 덜어져야 온전히 그 사람을 생각하며 슬퍼하는 상태가 돼요. 애도 상담을 하다 보면, 슬픔은 맨 마지막에 끌어올려지는 감정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자살 사별자들은 애도 상담이나 자조모임을 하면서 진짜 장례식을 치르게 되겠네요.
“실제 그런 말을 많이들 하세요. 이게 내 마음의 장례식 같다고. 다들 장례식을 경황없이 치르거든요. 자살이라는 걸 숨기거나, 아니면 아예 죽음을 알리지 않는 경우도 많고요. 그러다가 온전히 애도할 수 있게 되면서 진짜 장례식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애도 상담과 자조모임의 차이는 뭔가요.
“애도 상담은 개인 상담이에요. 개인의 고유한 상황에 초점을 맞춘 전문가의 상담이죠. 자조모임은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끼리 위로와 지지를 나누는 모임이에요. 자신보다 먼저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때론 그 어떤 전문가의 말보다 임팩트가 크거든요. ‘같은 경험을 했기 때문에 여기선 고인이나 자살에 대한 얘기를 해도 편견 없이 들어준다’는 안정감을 느끼게 한다는 게 큰 장점이에요. 또 고인과 다양한 관계의 사별자들이 모였기 때문에 죽음을 다양한 시각에서 조망할 수도 있어요. 예를 들면, 남편을 잃은 중년 여성은 청년 자살 사별자들을 보면서 자식의 입장을 생각해볼 수 있는 거죠. 이런 특성 때문에 애도 상담과 자조모임을 병행하는 내담자도 있어요.”
-‘여섯 밤의 애도’에 등장하는 ‘마인드 피크닉’은 어떻게 구성됐나요.
“처음부터 자살 사별자 자조모임을 다룬 책 집필을 염두에 두고 꾸린 모임이에요. 참가자들도 모두 그에 동의한 분들이고요.”
-모두 2030 여성들인데 그렇게 꾸린 이유가 있나요.
“그간 자조모임을 해보니, 같은 성별과 비슷한 연령대가 모였을 때 동질성이 큰 장점으로 작용하더라고요. 앞서 운영 중인 ‘메리골드’도 여성 청년으로 구성된 자살 사별자 자조모임이에요. 청년 사별자들은 대부분 형제나 자매를 잃은 경우거든요. 가족 내에서도 부모의 슬픔에 치여서, 자식 잃은 부모를 돌보느라 제대로 애도하지 못하기 마련이죠. 이 자조모임엔 파트너를 잃은 퀴어(성 소수자) 청년들도 와요. 이들이야말로 파트너를 잃은 슬픔을 어디에 말할 곳이 없거든요. 애도를 박탈당한 사람들이죠.”
-퀴어 자살 사별자들은 좀더 특수성이 있죠.
“맞아요. 자살 사별이란 게 제대로 슬퍼하지 못해 더 고통스러운 사별인데, 퀴어 자살 사별자들은 거기서 더 소외돼있죠. 고인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인데 죽음 이후의 시간에서 뒷전으로 밀리기 십상이니까요. 장례식에서도 조용히 있으라고 압박을 받거나, 아예 못 가기도 하고요. 법적으로 보장받는 권리도 없고요. 유품조차 받지 못하기도 해요. 퀴어 자살자 중에선 원가족과 관계가 좋지 않은 경우가 많은데, 정작 장례는 원가족 마음대로 하거나 파트너는 소외시키니 그런 데에 분노하기도 하고요.”
그가 운영하는 자조모임 ‘메리골드’엔 팔찌가 있다. 참가자가 오면, 고인과 관계에 따라 구분된 팔찌를 착용하는 거다. 그 중엔 파트너 팔찌도 있다. 퀴어 자살 사별자들은 그 팔찌를 보는 것만으로 눈물을 흘린다고 한다. ‘어디서도 허락 받지 못했던 슬픔을 여기서는 받아주는 구나’하는 위로를 받는 거다.
-‘여섯 밤의 애도’는 그런 자조모임을 더 세밀하게 보여주는 책이군요.
“네, 원래 자조모임은 참가자가 고정적이지 않아요. 새 참가자가 계속 들어오니까. 그런데 ‘마인드 피크닉’은 일종의 폐쇄 모임으로 만들었죠. 책 출간이라는 목적까지 공유한 다섯 명이 참여했어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모집했죠. 지난해 여름부터 준비해서 같은 해 12월부터 매주 1회 2시간씩 모임을 했어요. 자조모임을 시작하기 전과 후에 제가 전부 개별 상담을 했고요.”
책엔 남동생, 오빠, 여동생, 아버지, 언니를 잃은 자살 사별자 다섯 명이 등장한다. 사별의 시기는 2015~2019년까지 다양하다. 여섯 번의 밤을 보낸 뒤, 모임을 마치며 참가자들은 “맘껏 울 수 있어 좋았다” “가장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말하기 힘든 얘기였지만 애도의 폭이 넓어졌다” “고인의 죽음에 대해 내가 틀린 게 있었다는 걸 알았다”라고 말한다.
-모임을 거듭할수록 참가자들에게서 어떤 변화가 읽히던가요.
“책에 담긴 여섯 번의 모임은 완결이 아니라 과정이에요. 여섯 번의 모임은 짧다면 짧은 시간이죠. 각자 애도의 여정이 다르고 그 중간에 우연히 만난 사람들이니까. 마치 고속도로 휴게소 같은 거죠. 그곳에서 보낸 의미있는 시간이 나머지 길을 떠나는 데에 힘이 될 거예요. 참가자 각자 변화가 있었지만, 다 달라요. 어떻게 보면 그 여섯 번의 모임은 시작일 수도 있고, 어떤 계기일 수도 있어요. 부디 다른 자살 사별자들이 이 책을 읽고 ‘나도 그런 애도의 여정을 시작해볼까’하는 마음이 들었으면 해요. 해보면 두렵지 않거든요. 내게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안전한 관계인 누군가에게 얘기하는 게 의외로 괜찮은 일이고, 그것으로부터 시작이라는 것, 그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분명히 당신 곁에 있다는 걸 알게 되길 바라요. 또 자살 사별자의 주변 사람에겐, 당신이 자살 사별자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 그럴 수 있다는 걸 알리고 싶어요.”
-자조모임이 아니더라도, 내가 신뢰하는 안전한 관계의 사람과 고인의 죽음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 게 중요한 거군요.
“혼자 글을 쓰거나 허공에 대고 말하는 것과 내가 발화해 다른 사람에게 위로 받는 것은 정말 차이가 커요. 슬픔은 연결의 감성이고, 슬퍼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위로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사람이 필요하더라고요. 그 사람의 죽음을 함께 기억해주는 누군가가요. 자살 사별은 내게 일어난 일이고, 말하는 순간 목격자가 생겨요. 슬픔의 목격자는 애도 상담에서 굉장히 중요해요. 그 슬픔의 목격자가 되는 것, 그와 함께 슬퍼하는 건 너무나 가치 있는 일이에요.”
-자살 사별자들이 겪는 가장 큰 고통은 죄책감일 거 같아요.
“사랑하는 관계여도, 나쁜 관계여도 죄책감이 있죠. 모든 죽음은 유가족에게 후회와 죄책감을 남기는데, 자살 사별자가 느끼는 죄책감은 더 가혹하죠. 죽음의 가해자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다른 사람들이 ‘왜 자살을 막지 못했느냐’고 비난할까 봐 두려운 마음도 들고요.”
보건복지부와 중앙심리부검센터가 지난해 11월 발표한 ‘2020년 심리 부검면담 결과보고서’에 따르면, 자살사망자 566명 중 93.5%는 사망 전 ‘경고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주변인이 이를 알아차린 경우는 22.5%에 불과했다. “걱정했지만 자살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답변이 많았다.
-‘죽음을 막을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죄책감도 클 테고요.
“책에 등장하는 ‘마인드 피크닉’ 참가자 중 한 명이 죄책감으로부터 멀어진 계기를 말한 게 있어요. ‘나의 어떤 말이나 행동이 고인에게 절대적인 힘을 끼치거나 엄청난 변화를 주기는 힘들었겠구나’하는 걸 깨달았을 때라고요. 어떤 사람도 다른 누군가에게 완벽하게 지배적인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걸 안 거죠. 내가 감히 다 알 수 없었다는 걸 받아들이면, 그 죽음에 기여했다는 죄책감에서 좀 벗어날 수 있죠.”
-자살 사별자들이 애도 과정을 잘 겪어내면 무엇이 달라지나요.
“극심한 고통을 잘 겪어낸 분들을 보면, ‘외상 후 성장이란 게 이런 모습이구나’ 느껴져요. 이전의 자신과 다른 새로운 내가 되는 거죠. 힘들지만, 피하지 않고 치열하게 대면하면, 그런 변화가 오더라고요. 그래서 애도 상담하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책에 썼듯 애도는 치열한 노동이군요.
“애도 교과서에 있는 말이죠. 정말 동감해요. 시간이 흐른다고 치유되는 게 아니거든요. 그 시간 동안 무얼 하느냐에 달려있어요. 어딘가에 쓸어 담아두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고 싶어 하는 분들도 많지만, 결코 그렇게 되지 않는 일이거든요. 살면서 또 다른 상실이 찾아왔을 때, 그 상자의 뚜껑이 후루룩 열려버리죠.”
-책 중에서 “고인의 얘기를 맘껏 할 수 있어서 오히려 에너지가 생겼다”는 ‘마인드 피크닉’ 참가자의 반응이 인상적이었어요.
“애도에는 내가 평생 간직해야 할 연민 어린 고인의 스토리텔링이 필요해요. 고인의 얘기를 계속 하다 보면, 그가 이런 삶을 살았고 내게는 이런 존재였다는 스토리가 완성되거든요. 물론 남겨진 사람이 만드는 주관적인 이야기지만, 그렇더라도 의미가 있어요. 고인의 죽음이 아니라 삶 전체에 의미를 두게 되니까.”
-자살 사별자들을 자조모임으로 서로 연결하는 역할을 하는 이유는 뭔가요.
“애도 상담을 할 때, 이분이 자신의 얘기를 저분에게 해주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그래서 애도 상담이 어느 정도 진행되면 자조모임을 권하기도 해요. 자살 사별자들이 서로 연결돼서 어떤 전문가도 못하는 위로를 주고받는 걸 보면 정말 행복하죠. 자조모임을 제대로 운영하려면 정말 공이 많이 들거든요. 경제적으로 이득이 되는 일도 아니에요. 그런데도 이게 옳기 때문에 하고 있죠.”
-지금까지 살면서 지키려고 해온 삶의 도가 있다면 뭘까요.
“의미 있는 일을 제대로 하자는 거예요. 이타적인 소명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쨌든 제가 하는 일이 타인에게 선한 힘을 줄 수 있도록 애쓰며 살았어요. 공동체에 헌신하는 새로운 심리학을 할 수 있다는 걸 보이고 싶었죠. 유가족이 ‘정말 도움이 됐어요. 감사해요’, 심지어 ‘덕분에 살았어요’라는 얘기를 제게 하거든요. 내가 진짜 목숨을 구조한 건 아니지만, 어디서 그에 준하는 말을 들을 수 있겠어요. 죽음의 이야기를 듣고, 고통과 슬픔의 목격자로서 그걸 함께 겪어내는 건 정말 너무나 힘든 일이거든요. 하지만, 그 여정을 함께한 뒤 달라진 그분의 모습을 볼 때 느끼는 보람은 대체 불가예요. 그래서 이 일을 하고 있죠.”
그는 앞에 놓인 ‘여섯 밤의 애도’ 표지를 한번 쓰다듬었다. ‘참가자들이 혹은 자살 사별자들이 이 책을 보고 고통이 재현되는 건 아닐까’하는 자기 검열에 집필이 너무 어려웠다고 고백했다. 다 쓴 원고를 뒤엎기도 했다. 그래도 마칠 수 있었던 건 이 책이 담은 메시지를 알리고 싶어서일 테다. 자살 사별자는 누군가와 안전하게 연결되어야 하며, 당신이 그 슬픔의 목격자가 될 수 있다는 것.
그는 “진짜 목숨을 구한 건 아니지만”이라고 말했지만 왜 아니겠나. 진짜 살린 게 맞을 거다. 삶의 벼랑 끝에 선 것 같았을 자살 사별자들의 손을 그가 잡았으니. 그는 이 책으로 누군가의 고통이 박제될까 걱정했으나, 이 책은 멈춤의 순간을 적은 게 아닌 치유의 통로에 있는 사람들을 담은 진행형의 얘기다. 그래서 누군가에겐 희망의 신호다. 그가 말했다.
“내담자들이나 자조모임 참가자들이 그런 말을 하거든요. ‘여기 밖에 말할 데가 없어요.’ 이 책 하나 낸다고 해서 (자살 사별자들이) 당장 달려오진 않겠죠. 하지만 ‘내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과 모임이 있구나’라고 알고는 있는 것과 ‘어디에도 없다’고 느끼는 건 너무나 다른 상황이죠. 이 책이 그런 의미였으면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