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궁으로 사라진 '잔혹한 이반'

입력
2021.11.26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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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6 잔혹한 이반

'폭군 이반' 혹은 '잔혹한 이반(Ivan the Terrible)'은 16세기 러시아 황제 '이반 4세'의 별명이다. 궁정쿠데타로 집권한 전제권력자로 '차르' 칭호를 처음 썼던 그는 말년에 주변인에 대한 불신과 편집증이 심해져 아들을 몽둥이로 살해할 만큼 잔인한 짓을 서슴지 않았다. '뇌제(雷帝) 이반'이라고도 불린다.

2차대전 때 나치 폴란드 멸절수용소의 우크라이나 출신 한 간수가 이 섬뜩한 별명을 물려받았다. 가스실로 향하는 유대인 죄수들을 쇠몽둥이로 몰아붙이며 팔과 다리를 부러뜨리고, 칼로 귀나 코를 도려내는 잔혹한 짓을 재미 삼아 일삼던 자였다. 생존자들은 '이반'이란 이름의 그를 '잔혹한 이반'이라 불렀다고 증언했다.

1977년, 미 법무부는 1958년 시민권을 얻고 자동차 공장 기계공으로 일하며 아내와 세 자녀를 키운 '모범시민' 존 뎀얀유크(John Demjanjuk, 1920~2012)를 이민서류 허위 조작 혐의로 기소했다. 제보와 조사를 통해 그를 '잔혹한 이반'이라 확신하고도 나치 전범에 대한 처벌 법규가 없던 법무부는 1981년 연방 재판을 통해 그의 시민권을 박탈하고 이스라엘로 추방했다. 1986년 11월 26일 재판이 시작됐고, 1988년 1심 법원은 교수형을 선고했다. 생존자 증언, 나치 인사자료 기록, 사진 속 '이반'의 유사한 흉터 등이 근거였다. 5년 뒤 대법원은 그를 무죄 방면했다. 변호인이 제출한 반박 자료, 즉 이반 마르첸코(Ivan Marchenko)란 자가 문제의 이반이라고 기록된 구소련 나치 압수 문건이 결정적 반박 증거였다. 뎀얀유크는 자신이 수용소에 재직한 건 맞지만 잔혹행위를 한 적은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1998년 미국 시민권을 회복했다.

이듬해에 미 국무부는 수용소 재직 사실 미기재를 이유로 그의 시민권을 다시 박탈하고 독일로 송환했다. 뮌헨 법원에서 2011년 5월 5년형을 선고받은 그는 항소심 도중 지병으로 사망했다. 그렇게 진실은 묻혔다.

최윤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