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트 살인' 숱한 SOS 보냈지만... 공권력은 방관자였다

입력
2021.11.22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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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선고 판결문 104건 분석> 
경찰 신고·신변보호 등 27건 '전조' 
경찰 보호 못 받고 폭력 협박 노출
살인 등 범행 동기 다수 '이별 통보'  
'반성한다' '우발적' 집행유예 40건
경찰도 일반 폭력보다 가볍게 취급
"공권력, 일회성 아닌 적극 개입해야"

#2019년 7월 14일 연인으로부터 전치 4주 폭행 당함. 2019년 7월 18일 부여경찰서에 신변보호 요청. 2019년 9월 4일 주거 침입으로 가해자 벌금형. 2019년 11월 12일 폭행 후 강간당함. 2019년 12월 6일 폭행당함. 경찰에 신변보호 재요청. 2020년 2월 12일 세 번째 신변보호 요청. 2020년 5월 19일 살해당함.

A씨가 끔찍하게 살해되기까지 10개월에 걸쳐 폭행과 주거 침입이 반복됐다. 경찰에 신고가 들어와 기록된 것만 5차례, A씨는 살기 위해 발버둥쳤지만, 경찰은 신변보호 요청이 있을 때마다 가해자 B씨에게 '경고장'을 발부하는 데 그쳤다.

A씨는 어린 두 자녀가 보는 앞에서 흉기에 13차례나 찔렸다. 가해자 B씨는 법정에서 "A씨가 교제 관계를 단절하고 더 이상 만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살해 동기를 설명했다. 법원은 "피해자는 소중한 생명을 빼앗긴 뒤 피고인의 괴롭힘으로부터 벗어나게 됐다"며 B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가해자에게 중형이 선고됐지만, A씨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강력 범죄 '전조' 있었던 경우 많아

21일 한국일보가 올해 선고된 '데이트 폭력' 관련 판결문 104건을 분석한 결과, 27건은 '교제 살인' 피해자인 A씨의 경우처럼 강력범죄 전조가 있었다.

C씨는 지난해 6월 연인이던 D씨에게 살해당했다. C씨는 피살되기 사흘 전에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다'며 흉기로 자해하면서 협박한 D씨를 신고했다. 가해자가 경찰 조사를 받았지만 C씨는 결국 목숨을 잃었다. 법원은 살인과 특수협박 혐의로 기소된 D씨에 대해 '음주 상태에서 충동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는 점을 감안해 징역 12년을 선고했다. 피해자 유족에 1억9,000만 원의 합의금을 전달한 점도 참작했다.

형사처벌을 받고도 범행을 다시 저지르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여자친구 집에 무단침입한 혐의로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은 남성은 집행유예 기간에 다시 여자친구 집을 찾아가 폭행했다. 연인 관계였던 피해자를 폭행해 벌금 100만 원을 선고받았지만, 이듬해 또다시 '데이트 폭력'을 저지른 남성도 있었다.

헤어지자고 했더니 협박·감금·강간

데이트 폭력 범죄의 범행 동기로는 '이별 통보'가 가장 많았다. '자신을 무시했다' '전화를 받지 않았다' '선물을 준비하지 않았다' '성관계에 소홀했다' '다른 이성과 연락했다'며 폭력을 휘두르는 경우도 있었다.

2018년 2월 여자친구가 헤어지자고 했다는 이유로 넉 달 동안 수차례 감금하고 강간한 남성도 있었다. 여자친구 직장과 집을 찾아가 자해 소동을 벌이고, 여자친구가 다른 남성을 만나고 있는지 확인하겠다며 여자친구 차량의 블랙박스 메모리카드까지 훔쳤다. 여자친구가 "무서워서 못 만나겠다"고 하자, "너는 차에서 내려주면 고소하니까 무조건 데리고 살아야겠다. 내일 혼인신고 한다"고 말하며, 목을 조르고 흉기로 위협하기도 했다. 이 같은 무지막지한 폭력이 4개월 가까이 이어졌지만 법원은 가해자에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2년간 교제하다가 헤어진 연인에게 74차례에 걸쳐 협박성 문자를 보내고 피해자가 일하는 사무실을 찾아가 폭행한 남성도 있었다. 피해자는 "네가 헤어지자고 하면 내가 헤어질 줄 알았어?" "끝까지 전화 안 받고 개무시하고 있다가 나를 어디서 만날지 잘 두고 봐라" "전화 안 받지 즉시 찾아가서 이번엔 바로 죽는다" 등의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사람 죽였지만 징역 4년 "반성해서"

데이트 폭력은 끔찍한 결과로 이어지고 있지만 처벌 수위는 낮았다. 검찰이 2018년 '데이트 폭력 삼진 아웃제'를 언급하면서 엄벌 방침을 밝혔지만, 104건 중에서 집행유예에 그친 경우가 40건에 달했다. "우발적이었다" "가해자가 깊이 반성하고 있다"는 것이 선처 사유였다.

실제로 동거하던 여자친구가 헤어지자고 말했다는 이유로, 가해자가 목을 조르고 발로 수차례 걷어차고 옷을 벗겨 카메라로 촬영까지 했지만 법원은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가해자가 진지하게 반성하고 있다는 게 이유였다.

피해자가 사망했지만 살인 혐의보다 형량이 가벼운 폭행치사 혐의가 적용돼 '겨우' 징역 4년이 선고된 경우도 있었다. 욕설을 했다는 이유로 연인을 발로 걷어차 내장 파열 등으로 사망케 한 가해자에 대해, 법원은 "술에 취한 상태에서 우발적으로 범행했고 깊이 반성하고 있다"며 이같이 판결했다.

"데이트 폭력, 사소한 일로 취급… 예방할 기회 놓친다"

경찰청이 양기대 더불어민주당 의원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2016년 이후 5년간 접수된 데이트 폭력 신고(8만1,056건)의 75.4%(6만1,133건)가 살인, 성폭력, 폭행·상해, 체포·감금·협박 등의 강력범죄였다.

박미랑 한남대 경찰학과 교수는 "데이트 폭력은 오랜 기간 동안 벌어지고, 경찰 신고 등 사전 징후 또한 뚜렷한 편이지만 경찰은 일반 폭력에 비해 아직도 '가벼운 사건'으로 취급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박 교수는 "반복된 데이트 폭력의 결말은 결국 한쪽이 죽는 것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며 "일회성 조치만으로 역할을 다했다고 할 게 아니라 경찰이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원다라 기자
장수현 기자
김소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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