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없는 지옥행, 팬데믹 공포와 닮았다' 사로잡힌 세계 MZ세대

입력
2021.11.2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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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 공개 당일 넷플릭스 전 세계 1위
무차별 사망통지=팬데믹, 시스템 불신=이단 성행
세계 OTT 시장 파고드는 K드라마 사회학 
CJ ENM·JTBC스튜디오 미국 제작사 인수
소프트·하드웨어 영향력 동시에 키우려는 전략

'지옥'이 한국 드라마 최초로 세계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넷플릭스에서 공개 하루 만에 전 세계 1위를 차지했다. '오징어 게임'에 이은 연타석 흥행 홈런으로, 'K드라마'가 넷플릭스 1, 2위를 휩쓸며 세계 대중문화 시장의 판도를 확 바꿀 '게임 체인저'로 급부상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으로 심화하는 경제 불평등과 인종차별 등 지옥 같은 공포를 실감나게 다루면서 세계 MZ세대(1980년대 초반~2000년대 초반 출생)를 사로잡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오징어 게임'보다 닷새 빨리 정상에

21일 OTT 소비량을 집계하는 플릭스패트롤에 따르면 '지옥'은 20일 기준 벨기에 홍콩 자메이카 멕시코 루마니아 등 24개국에서 TV쇼 부문 1위를 차지하며, 19일까지 이 부문 정상을 차지한 '오징어 게임'을 2위로 밀어냈다. K드라마가 넷플릭스에서 1위를 바통터치하는 진풍경을 연출한 것이다. '지옥'의 흥행 속도는 공개 6일 만에 1위를 기록한 '오징어 게임'보다 닷새 빠르다.

'지옥'의 문을 연 해외 시청자들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사람이 얼마나 쉽게 사람을 굴복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공포를 느꼈다. 어떤 형태로든 지금 모든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아 더 놀랍다"(@wellhu***), "'오징어 게임' 보다 '지옥'이 더 재미있다. 단순한 디스토피아 드라마가 아니다"(@miko***) 등의 후기를 영어와 일본어로 올려 호응했다.

유명 영화 평점 사이트인 로튼토마토는 이날 기준 '지옥'의 신선도를 100%로 평가했다. '지옥'이 '오징어 게임'보다 더 빠른 속도로 흥행 질주를 이어갈 것이란 전망이 벌써 나오는 배경이다. 영국 BBC는 "엄청난 성공을 거둔 '오징어 게임'에 이어, '지옥'은 이미 치솟고 있는 한국의 TV와 영화산업의 국제적 위상을 더욱 높일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지옥행, 이유 없다'... K드라마, 공포의 사회학

'오징어 게임'이 계급적 불평등을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등 한국의 전통놀이를 통한 게임으로 쉽게 부각했다면, '지옥'은 불가항력에 속수무책인 인간의 공포를 컴퓨터그래픽(CG)으로 흥미진진하게 보여줘 몰입도를 높인다. '지옥'은 천사로부터 죽을 날을 고지받은 남자가 서울 도심에서 '지옥 사자'에 무참히 살해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등장인물들은 왜 사망 고지를 받는지 그리고 왜 지옥에 가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극에서 사망 통지는 무차별적으로 확진되는 팬데믹 공포의 은유처럼 읽히고, 그 재난은 지옥 사자란 캐릭터로 입체화된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지옥'이 만약 영미권 드라마였다면 인간과 사자가 싸우는 식으로 전개됐겠지만, 정작 드라마는 지옥을 보여주지 않은 채 재난 같은 상황에서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집중하는데 바로 이게 K드라마의 특징"이라며 "이런 점이 해외 시청자들에 신선하게 다가간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김헌식 동아방송대 교수는 "'지옥'은 정작 지옥은 신이 아닌 사람이 만든 것이라는 역설"이라며 "사법 불신으로 인해 사적 복수에 대한 열망이 커진 데다 팬데믹으로 현실이 혼란의 소용돌이에 놓이면서 이 무차별적 응징에 MZ세대가 거리낌없이 다가가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지옥'은 혼란을 파고든 사이비 종교단체와 사건의 실체를 밝히려는 이들이 부딪치는 이야기를 다룬다. 유아인이 '새진리회' 의장으로, 김신록이 지옥행 고지를 받은 아이 엄마 박정자로 나와 공포를 굴린다. '지옥'의 동명 웹툰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다. 웹툰 '송곳'의 최규석 작가가 원작 그림을, 영화 '부산행'으로 유명한 연상호 감독이 극본과 연출을 맡았다.

연상호 감독은 이날 본보와의 통화에서 "'지옥'이 죄와 벌 그리고 이 혼란의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보편적 주제를 다뤄 언어의 벽을 뛰어넘어 적잖이 봐주신 것 같다"며 "요즘 '오징어 게임'으로 한국 콘텐츠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져 '부산행'을 OTT에서 찾아보는 시청자도 있다고 해 여러모로 신기하고 놀랍다"고 말했다. 배우 강수연과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정이'를 촬영중인 연 감독은 '지옥' 시즌2 제작 계획에 대해 "아직 논의된 것은 없다"며 웃었다.


OTT, 한국 드라마 각축장... CJ ENM 등 미국 제작사 인수 이유

'제2의 오징어 게임'으로 불리는 '지옥'의 흥행으로 세계 OTT시장은 K드라마의 각축지가 됐다.

이날 기준 넷플릭스 TV쇼 부문 톱10엔 KBS에서 방송하는 사극 '연모'(9위) 등 K드라마 세 작품이 올랐다.

이런 K드라마의 영향력을 바탕으로 국내 콘텐츠 기획사는 미국 굴지의 제작사를 인수해 세계 대중문화 산업에서 영향력을 더 키우려는 움직임이다.

CJ ENM은 영화 '라라랜드' 제작에 참여한 할리우드 제작사 '엔데버 콘텐트'를 7억7,500만 달러(9,250억 원)를 주고 인수한다고 19일 밝혔다. 앞서 JTBC스튜디오는 방송계의 퓰리처상으로 불리는 피버디상을 수상한 '디킨슨'을 제작한 미국 콘텐츠 회사 '윕'을 올 상반기에 사들였다. 지상파에서 방송 중인 드라마를 제작한 기획사의 대표는 "한국 대중문화 기업의 미국 제작사 인수는 현지 제작 인력을 흡수해 콘텐츠 경쟁력을 높이려는 전략"이라며 "북미뿐 아니라 남미도 주 OTT시장으로 떠오른 것도 현지 진출의 배경"이라고 말했다.

양승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