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대·방치로 얼룩진 어린 시절... 좋은 어른이 될 수 있을까요?

입력
2021.11.22 04:30
24면

편집자주

‘오은영의 화해’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가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저는 새아빠의 학대, 엄마의 방치로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낸 대학생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는 지금, 제가 좋은 어른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다섯 살 때 암 투병을 하던 아빠가 돌아가셨어요. 당시 엄마는 임신 중이어서 저는 엄마 품 대신 친척집을 떠돌며 지냈습니다. 보육원에 가기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가 데리러 왔고 돌아간 집에는 삼촌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첫 새아빠였습니다. 초등학교 3~6학년은 두 번째 새아빠와 살게 됐습니다. 새아빠는 어린 게 똑똑한 척 나댄다며 저를 혼내고 때렸습니다. 뺨을 때리거나 효자손이 부러질 때까지 종아리를 맞은 적도 있습니다.

결국 중학교 입학 직전 저와 동생은 보육원에 보내졌어요. 중학교 3년을 그곳에서 보냈습니다. 보육원 사모님은 처음엔 잘해줬지만 갈수록 저와 동생을 싫어했습니다. 그 이유는 최근에 전해 들었는데, 저희 엄마가 술을 마시면 사모님께 전화해 한탄을 하거나 돈을 요구했다고 하더군요.

보육원이 너무 싫었던 저는 엄마에게 고등학생이 되면 여기서 빼내 달라고 제안했습니다. 기숙사가 있는 특성화고에 갈 테니 기숙사비만 내주면 용돈은 제가 아르바이트를 해서 벌겠다고요. 제 바람대로 됐는데, 그래도 주말에는 기숙사를 나가야 해서 친구 집을 전전하거나 본가에 내려갔습니다. 본가에 가더라도 오래 머무르지는 않았어요. 저는 약속대로 편의점에서 12시간 아르바이트 등을 하며 교통비, 휴대폰 요금까지 직접 벌어 썼어요. 엄마는 여전히 술을 많이 마셨고, 이쯤 엄마의 남자가 또 바뀐 것 같았습니다. 두 번째 새아빠 이후의 남자들은 저와 거의 마주치지 않았기 때문에 기억도 잘 나지 않습니다.

고3 겨울방학 때 골프장 캐디로 취직을 하게 됐어요. 본가에서 나와 10개월 동안 골프장에서 일하며 2,000만 원을 모았습니다. 그 후 1년 더 아르바이트와 공부를 병행한 뒤 가고 싶었던 대학에 한 번에 합격했어요.

그런데 대학 입학 후 두 달쯤 지난 무렵부터 갑자기 사람을 만나는 게 힘들어져 기숙사 방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어요. 그냥 다 그만하고 싶었습니다. 지금 와서 그 때 왜 그랬을까 생각해 보면 부족한 생활비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돈이 없어서 하루에 한 끼 겨우 먹었고 엄마에게도 50만 원을 빌려야 했습니다.

술도 많이 마셨어요. 일주일에 6, 7일을 술에 취해 살았고 총 세 번의 학사 경고를 받았습니다. 스물한 살 때부터 정신과를 찾았는데 술에 취해 상담을 받으러 간 적도 있습니다. 술을 마시면 자해를 하거나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기도 했어요. 그러다 2년 전쯤 계속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일단 휴학을 했습니다. 고등학교 겨울방학 이후 쉬어 본 적이 없었어요. 여행도 다니고 술도 끊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오래 살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엄마와는 3년 전쯤 연락을 끊었습니다. 본가에 갔을 때 엄마가 또 다른 아저씨와 살면서 다단계 판매업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엄마가 저에게도 "같이 하자"고 제안하는 순간 뭔가 툭, 끊기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길로 집에 있던 제 짐을 모두 싸서 나왔습니다.

저는 지금 마지막 학기를 다니고 있습니다. 방황하기도 했지만 열심히 살아온 스스로가 대견하고 기특해요. 그러다가도 문득, 누군가에게 저는 그냥 돈도 직장도 없고 학점 나쁜 나이 많은 대학생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이런 태도로 계속 살아가도 괜찮은 걸까요? 좋은 어른이 될 수 있을까요?

이송희(가명·26·대학생)

송희씨, 당신이 살아온 인생을 읽으면서 어린 시절부터 겪었을 인간에 대한 의구심, 고통, 슬픔, 번민, 외로움이 고스란히 전해졌습니다. 가엾다고 말하기에는 단어가 너무 가볍다고 느껴질 만큼 당신이 가여워서 가슴 저미도록 마음이 아팠습니다. 당신이 겪고 있는 정신적 문제의 근원인 송희씨와 엄마의 관계,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아요.

송희씨는 어릴 때부터 엄마에게 나는 마치 '여벌 옷' 같은 존재라고 느꼈을 것 같아요. 부모에게 자식은 '단벌 옷' 같은 존재입니다. 어떤 부모는 자식을 구하러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 들어갑니다. 자식을 최우선으로 두죠. 하지만 엄마에게 당신이 '어떤 상황에서도 언제나 가장 먼저 고려되는 대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너무 슬펐을 것 같아요.

아이들은 부모에게, 특히 나를 낳아준 엄마에게 내가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존재인 것이 중요해요. 아이에게 부모는 우주라고 보통 표현합니다. 그런 우주가 자신을 여의치 않으면 맡겼다가, 또 상황이 좀 나아지면 데리고 있다가 합니다. 전혀 보호받지 못했던 당신은 얼마나 두려웠을까요. 나를 또 버리지 않을까, 이런 마음에 자기 삶을 예측하기도 어려웠을 거예요.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당신의 내면에 메우기 힘든 구멍을 만들었을 테고, 어떤 때는 인생이 너덜너덜하다고 느꼈을 것 같아요.

송희씨는 그럼에도 오뚝이처럼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런 당신을 보며 그럼 뭘 붙잡고 살아왔을까, 무엇이 당신을 버티고 지탱할 수 있게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송희씨는 부모(타인)에게서 받아야 하는 조건 없는 깊은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자기 자신을 놓지 않고 붙잡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요. 훌륭합니다.

보육원이 싫으면 그냥 도망가는 선택을 할 수도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송희씨는 현명하게 기숙사 학교에 가겠다며 엄마를 설득합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캐디를 하면서 대학 등록금을 벌어요. 정신적으로 힘들어지면 알아서 병원도 찾아갑니다. 생활력이 강하고 야무지다는 말로는 부족합니다. 이런 마음과 행동이 자기에 대한 끈을 놓지 않는 것이거든요. 송희씨는 어릴 때부터 자기의 생존을 자기가 돕는 사람이에요. 당신은 무너지더라도 마지막 순간에 고개를 탁 들고 일어납니다. 이게 송희씨 내면의 힘입니다.

추측하건대 엄마와 연락을 이어왔던 것도, 당신 자신의 근원을 끊임없이 탐구하려는 마음이 컸던 것 같아요. '이런 엄마라도 엄마의 사랑을 받고 싶어', '엄마가 안쓰러워'라는 마음보다는 자기를 이해하기 위해서요. 엄마라는 사람은 도대체 나를 왜 낳았고, 엄마에게 나는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끊임없는 의구심이 엄마와의 끈을 마지막까지 못 놓게 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 엄마의 다단계 판매 제안에 결국 의절을 하죠. 송희씨는 이미 엄마가 어떤 사람인지 너무나 잘 알고 기대도 없었을 거예요. 하지만 엄마가 이제 하다하다 나를 이렇게까지 취급하는구나, 나를 돈벌이 수단으로 대하는구나, 라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 엄마에 대한 모든 감정의 끈을 다 끊어버립니다. 물론, 송희씨가 엄마에게 휘둘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건 알아요. 다단계를 하자고 했을 때 솔깃하는 마음조차 없었을 거예요. 하지만 엄마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대하는지를 인식할 때마다 칠흑 같은 암흑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고통을 느꼈을 겁니다. 어떤 사람이 자식에게 부모와의 관계를 단절하라고 쉽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송희씨에게는 엄마와의 단절이 최선이었을 겁니다. 반복되면 견디기 힘들었을 거예요.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었던 어린 시절, 엄마에 의해 떠돌아다녀야 했고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었던 송희씨의 불안과 두려움이 얼마나 컸을까요. 이런 환경에서도 자기 삶을 잘 통제했던 당신이 대학생이 돼서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경제적인 문제가 생기면서, 이제까지 송희씨를 지탱해 왔던 통제력을 상실했고 불안이 극도로 심해졌던 것 같아요. 제가 보기에는 술도 큰 원인으로 작용한 것 같습니다.

송희씨와 송희씨 엄마는 술에 대한 유전적인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술이 한 방울 들어가면 이를 통제할 수 없는, 의지로 음주량을 제어할 수 없는 사람들이죠. 더군다나 당신은 술을 우울해서, 잠이 안 와서와 같이 자가치유적인 방법으로 이용합니다. 그러나 술을 이렇게 반복적으로 마시다 보면 초기에는 우울한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 같지만 나중에는 더 우울해지고, 잠이 잘 오는 것 같지만 진행되면 불면증은 더 심해져요. 제가 어린 송희씨를 만나면 절대로 술을 가까이 하지 말라고 말해줬을 것 같아요. 한 방울이라도요. 제가 지금 당신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도 술을 조심하라는 겁니다.

송희씨, 당신이 겪은 일들은 살아오면서 아무나 겪는 흔한 일이 아닙니다. 별일 아닌 게 아니에요. 당신은 그 와중에도 자신에 대한 끈을 놓지 않고 잘 버텨 왔어요. 그러니 이제 당신의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세요. 엄마와의 연을 매듭짓고 당신의 인생을 '창조'하세요.

이를 위해서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를 넓히라는 조언을 하고 싶어요. 내가 어린 시절 중요한 사람으로부터 이런 영향을 받아 이런 면이 형성됐고, 그래서 현재 삶 속에서 이런 게 건드려지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스스로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엄마를 미워하는 마음도 들겠지요. 그러나 송희씨 마음 깊은 곳에서 엄마를 미워하는 마음이 든다고 해서 당신이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엄마를 문제가 많은 한 인간으로 바라보고 엄마가 내게 준 영향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있어야 그나마 당신이 덜 다칠 거예요. 끊임없는 탐구와 성찰로 자기에 대해 잘 알아가고 이 과정에서 '자기 수용'을 하는 게 중요해요.

송희씨가 오래 살고 싶지 않다고 하는 것도,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과정을 거치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잘나지 못해도, 잘 해내지 못해도, 태어난 순간부터 자신이 생존할 만한 가치 있는 인간이라는 자긍심이 단단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당신은 내면의 구멍이 건드려지면 너무 아프다 못해 자신을 사멸시키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거예요. 송희씨는 자기를 정말 사랑해야 할 필요가 있어요. '소중한 존재인 너 자신을 사랑해라'라는 자주 듣는 소리와는 결이 조금 달라요. 제가 말하는 자기를 사랑하라는 의미는 자기를 제대로 알아차리고 자기를 편안하게 받아들이라는 자기 수용의 의미입니다.

송희씨는 잘 살아왔어요. 너무 치열하게 최선을 다해 자기 자신을 지켜 왔습니다. 당신이 자신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통해 내면이 조금 더 성장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나 오래오래 살고 싶다'고요. 그런 날이 곧 오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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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송옥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