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이닝은 그냥 즐겨봐" 덕수고 '우승 드라마' 쓴 정윤진 감독

입력
2021.11.17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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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치 때만 우승 두 번…"봉황대기 한 풀었죠"
"심준석 부진? 훈련 부족한 선수 쓴 내 불찰"
"제2의 장재영보단 더 많은 이정호 키우고 싶어요"

16일 목동구장에서 열린 제49회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결승전. 유신고에 3-5로 뒤져 패색이 짙던 덕수고가 9회 7-5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자 정윤진(50) 덕수고 감독은 눈물을 보였다. 2007년 감독 부임 이후 앞서 13번이나 우승컵을 들어올렸지만 이날은 감회가 남달랐다. 드라마 같은 우승을 거머쥔 다음날. 정 감독은 "사실 선수들에게 부담을 줄까봐 내색은 안했지만 봉황대기 우승을 꼭 하고 싶었다"고 털어놨다.

13년 코치 생활 처음과 끝(1994~2006년)을 우승으로 장식했던 정 감독은 지휘봉을 잡은 뒤에는 유독 봉황대기와 인연이 닿지 않았다. 대통령배(2008년), 청룡기(2012년), 황금사자기(2013년), 협회장기(2013년) 등 우승을 밥 먹듯 했지만 봉황대기에선 2007년 준우승이 최고 성적이었다. 2016년과 2018년에도 4강까지였다. 정 감독은 17일 "그만큼 봉황대기에 미련이 컸고, 극적인 우승으로 끝나면서 더 감정이 밀려왔던 것 같다"고 웃었다. 그는 이번 우승으로 현역 사령탑 중 고교 5개 전국대회 우승컵을 모두 거머쥐는 최초의 기록도 달성했다.

정 감독은 짜릿했던 9회 역전 상황을 돌아봤다. 3-3 균형을 맞췄다가 8회말 다시 2점을 내줘 분위기가 가라앉은 채 9회초 마지막 공격에 돌입하기 직전이었다. 정 감독은 선수들을 불러 모아 말했다. "그동안 너희들 너무 잘했기 때문에 감독님 우승 바라지 않는다. 마지막 이닝은 그냥 즐겨봐." 마음이 편해진 선수들은 거짓말 같은 역전 우승을 일궜다.

덕수고는 우승후보로 꼽혔지만 내부 사정을 들여다보면 우여곡절이 많았다. 정 감독은 "주전들의 부상 때문에 선수가 부족해 큰 기대를 안 했다"면서 "경기를 할수록 선수ㆍ코치 간 케미가 잘 맞아 돌아가면서 선수들이 자기 실력의 120%를 해줬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노력해준 선수들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대회 내내 화제의 중심에 섰던 '초고교급' 투수 심준석(2년)에 대한 미안함도 드러냈다. 심준석은 203일 만의 복귀전을 거쳐 이번 대회 4경기에 나섰지만 제구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아 고전했다. 특히 결승전 6회 구원 등판했지만 연속 볼넷이 화근이 됐고, 결정적인 악송구로 패배의 원흉이 될 뻔했다. 그러나 정 감독은 "몸이 완전치 않은 상태여서 대회 출전을 만류했는데 몸 상태는 문제없지만 훈련량이 적었던 거다. (심)준석이의 의지와 열정만 믿고 함께했는데 지나고 보니 내 불찰이다"라고 했다.

정 감독은 학창시절 7년, 코치 13년, 감독으로 15년을 재직 중인 '덕수인'이다. 선수로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확고한 지도 철학과 탁월한 육성 능력으로 아마추어 명장으로 거듭났다. 그동안 장재영(키움) 나승엽(롯데) 심준석 같은 대형 선수를 키워낸 명장이지만, 한편으로 엘리트로 성공하지 못한 선수들의 제2의 인생을 돕는 선생님 몫도 한다. 그는 학생들에게 늘 말한다. "너희들이 5, 6년 동안 야구를 해 왔고, 죽기 살기로 최선을 다해라. 하지만 그렇다고 야구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라고. 정 감독은 "프로에 지명되고, 거기에서 또 살아남아 자유계약선수(FA)까지 되는 선수들은 3% 미만이다. 나머지 97%는 젊었을 때 즐거워서 야구를 하는 거다. 그래서 공부도 해야 되고 사회에 나가 성공하기 위해선 성실과 신뢰와 미래에 대한 비전 제시가 있어야 된다"고 강조했다. 그런 점에서 2012년 서울대에 진학한 야구선수 이정호를 떠올리면 지금도 뿌듯하다고 했다. 정 감독은 "2년 전 졸업한 김산호란 선수도 서울시립대에 수석 입학을 했다"면서 "앞으로도 야구와 공부를 효과적으로 병행시키면서 아이들의 불안한 미래를 지울 수 있는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성환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