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부족인 월드컵 예선에도 베트남이 포기하지 않는 이유

입력
2021.11.25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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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우리가 몰랐던 베트남 축구

편집자주

국내 일간지 최초로 2017년 베트남 상주 특파원을 파견한 <한국일보>가 2020년 2월 부임한 2기 특파원을 통해 두 번째 인사(짜오)를 건넵니다. 베트남 사회 전반을 폭넓게 소개한 3년의 성과를 바탕으로 급변하는 베트남의 오늘을 격주 목요일마다 전달합니다.


지난 11일 열린 베트남과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간 '2022 카타르 월드컵' 아시아 B조 최종예선 5차전. 자국 대표팀 응원만큼은 전 세계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베트남이지만, 그날 수도 하노이 전역은 경기 내내 슬프도록 조용하기만 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재확산으로 자국 홈 경기의 직접 응원이 제한되고 방역 통제로 그 흔한 오토바이 경적 응원도 없는, 전혀 '베트남스럽지 않은' 풍경이었던 것이다.

베트남인들은 전반 16분 일본의 스트라이커 이토 준야에게 골을 먹혔을 때도 침묵했다. 지난 9월 3일 새벽 1시에 열린 사우디아라비아와의 최종예선 1차전 원정 경기 패배 당시, 코너킥 찬스 때마다 환호와 탄성을 질러 외국인들의 밤잠을 앗아가던 그들이 아니었다. 일본에 지면 5전 전패, 사실상 월드컵 예선 탈락 확정이기에 미리 의기소침해진 것일까. 일순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그렇게 경기가 마무리되던 후반 39분, 예상치 못한 순간 아파트 단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크게 요동쳤다. "이게 베트남 정신이다(đây là tinh thần việt nam)!" "잘했다(Tốt lắm)!" 5,000가구가 창문을 열고 다닥다닥 붙어 사는 덕에, 그들의 목소리는 마치 같은 쇼파에서 함께 응원하듯 선명히 들렸다.

당시 TV 화면에선 베트남의 골키퍼 부이떤쯔엉이 일본 진영을 향해 골킥을 차고 있었다. 평범한 인플레이 장면이 아닌가 할 수 있지만, 쯔엉은 함성이 터지기 불과 18초 전 골문으로 돌진하던 일본 미드필더 히데마사 모리타를 막는 과정에서 그의 무릎에 얼굴 측면을 맞아 쓰러졌던 선수였다. 중동의 어떤 국가 대표팀이었다면 족히 10분은 '침대 축구'를 구사했을 법한 큰 고통. 하지만 쯔엉은 결연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켰고, 추가 실점 없이 경기를 마쳤다.

석패의 다음 날, 베트남 국영방송 등 대다수 현지 매체도 대표팀의 투혼에 집중했다. 현재의 베트남 축구 전력에 대한 아쉬움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항복하지 않겠다는 선수들의 의지가 돋보인 경기였다"고 한목소리로 강조한 것이다. 위기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이른바 '베트남 정신'. 철 지난 레퍼토리 같은 이 단어는 여전히 베트남 축구를 강력히 지배하고 있었다.

정신 승리만 하다 놓친 '17년의 도전'

축구에서 '투지' 등 심리적 요소를 강조하는 쪽은 대부분 약팀이다. "강팀에 비해 부족한 체력·체격, 전술·기술을 정신력으로 극복하라." 축구변방국으로 불렸던, 천신만고 끝에 월드컵 본선에 오르곤 했던 과거 한국도 다를 바 없었다. 본선 진출 이후도 마찬가지다. 1994년 독일전에서의 후반 막판 두 골 추격, 1998년 벨기에전에서의 동점골 당시 비슷한 표현으로 희망을 노래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다만 베트남은 축구에 '승전국(勝戰國)의 자부심'까지 투영시켰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베트남은 자국 영토에서 미국을 물리친 지 2년 후인 1975년, 야심차게 남북 연합 축구 국가대표팀을 창설했다. 5년 뒤엔 한국의 과거 '대통령배'와 유사한, 'A1축구대회'를 만들어 대표팀 라인업 발굴 및 육성에 적극 힘썼다. 그리고 1994년 월드컵 아시아 지역예선. 국제무대에 모습을 드러낸 베트남은 "축구에서도 열강들을 꺾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출사표를 던졌다.

그러나 축구는 재래식 전쟁과 너무도 달랐다. 홈이냐 원정이냐, 정도 차이는 있어도 전 세계 어딜 가든 동일 규격의 축구장에서 동일 인원이 각자의 두 발로만 결과를 만들어야 했다. 정글 지하 벙커도 없고, 국민들의 애국심 무장이 승리를 만들어 주지도 않았다. 첫 월드컵 지역예선에선 그나마 인도네시아를 상대로 1승을 거뒀을 뿐, 다음 라운드 진출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축구 강국과의 격차를 절감한 베트남은 이후 '실용주의' 노선으로 전환했다. 비록 세계적 명장까진 아니어도, 능력 있는 외국인 감독을 선임해 체질 개선에 나선 것이다. 하지만 정신 무장만 된 베트남 선수들은 선진 축구 틀에 녹아들지 못했다. 실제로 '박항서 감독 이전 베트남이 가장 사랑했던 외국인'으로 불렸던 알프레드 리들(오스트리아) 전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마저도 "베트남은 아시아 상위권과의 격차를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고 토로할 정도였다. 1998년부터 2007년까지 세 차례나 베트남 대표팀을 맡았던 리들 전 감독은 동남아시안게임(SEA)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게 업적의 전부다.

이후에도 베트남은 포르투갈(엔리케 칼리스토 감독) 독일(팔코 괴츠 감독) 브라질(에드손 타바레스 감독) 등 5개국의 축구 이식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외국인 감독들이 현지의 축구 정서를 고려한 접근 없이, 단순히 기술과 세계적 축구 흐름 전수에만 집중한 탓이다. 그 결과, 2017년 10월 박 감독이 대표팀 사령탑으로 부임하기 전, 베트남은 총 7번의 월드컵 예선에 참가해 10승 3무 25패, 42득점 56실점의 처참한 성적표만 남겼다.

업그레이드된 '베트남 정신'… "3년 뒤가 진짜 승부"

박 감독은 굳이 '베트남 이해'라는 사전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됐다. 투지만 강조하는 축구는 이미 한국에서의 선수 시절 충분히 경험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거스 히딩크 한국 대표팀 감독의 '약팀 레벨업' 노하우도 대표팀 수석코치를 맡으며 흡수했다. 정서적 측면에선 '이야기가 통하는 외국인', 전술적 측면에선 '허세 없는 맞춤형 감독'이 될 조건이 충분했던 셈이다.

현 베트남 축구의 황금세대로 불리는 '2017년 20세 이하(U-20) 월드컵 출전 멤버'들도 박 감독의 지도로 기량이 크게 발전했다. 추상적이었던 정신력은 구체적 목표와 동기로 업그레이드됐고, 체력 및 기초 전술 습득 훈련이 무섭도록 반복되면서 '겉멋'도 제거됐다. 베트남은 이후 황금세대를 중심으로 '독하게 뛰면서 이길 줄도 아는 팀'으로 변모했고, 결국 지난 6월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에 처음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비록 최종예선에서 전패 중이지만, '박항서식' 베트남 축구 경쟁력 강화 프로젝트는 차분히 진행되고 있다. 실제로 박 감독은 일본전 직후 열린 기자회견에서도 패배에 대한 항변이 아닌, 베트남이 개선해야 할 방향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베트남 축구가 지금보다 더 발전하기 위해선 프로리그(V리그)에 어리고 가능성 있는 자국 선수들을 안정적으로 출전시킬 수 있는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그것이 강팀과 약팀의 차이다." 주구장창 정신력만 강조할 게 아니라 시스템적 고민을 더 해야 한다는, 애정이 담긴 쓴소리였다.

익명을 요구한 베트남 축구 전문가 A씨도 박 감독의 지적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는 "2000년대 초중반, 베트남 모 대기업의 후원으로 영국 프로축구팀인 아스널의 유소년 축구 아카데미 등에서 연수를 받은 응우옌콩푸엉 등이 지금의 황금세대로 성장한 점에 주목해야 한다"며 "태어날 때부터 강력한 애국심이 체화되는 베트남인들이 제대로 된 훈련과 환경만 제공받는다면, 베트남 국가대표팀은 앞으로 무시하기 힘든 전력을 구축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지난 15일 하노이 옛 도심에서 만난 '축구 국가대표팀 서포터' 찌엔(가명·37)의 꿈은 더 창대했다. 그는 "베트남인들에게 월드컵은 독일·브라질 정도의 축구팀만 경쟁하는, 새벽에 일어나서 보는 '구름 위의 세상'이었다"며 "베트남 정신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면서도 현실을 일깨우는 박 감독이 있기에 우리는 3년 뒤 두 번째 월드컵 예선이 진짜 승부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FC의 광팬이었다는 그의 손엔, '베트남 메시'로 불리는 응우옌꽝하이의 하노이FC 유니폼이 들려 있었다.


하노이= 정재호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