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출 시장 뒤죽박죽 인데… 당국 "금리는 시장이 결정" 뒷짐만

입력
2021.11.15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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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량 규제 탓에 뒤집힌 대출 원칙
은행권은 금리 올려 이익 내고 차주만 피해
대출금리 적절한지 따져보는 당국 점검 필요

# 세종시에서 혼자 미용실을 운영 중인 30대 A씨는 전셋값을 7,000만 원 올려달라는 집주인 연락에 골치가 아프다. 시중은행 대출 상담을 받아보니 이자만 한 달에 20만 원 가까이 더 들게 생겼다. 금리가 높아 생전 쳐다보지 않았던 2금융권이 더 싸게 돈을 빌려준다는 소식에는 기가 찼다. 그는 "손님들과 하루에 (금융위원장인) 고승범 욕을 몇 번이나 하는지 모르겠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금융당국이 가계부채 규제를 강력하게 실시한 여파로 대출 시장이 뒤죽박죽이다. 금융권에서 가장 건전한 1금융권 대출금리가 2금융권을 웃돌고 확실한 담보 물건이 있는 주택담보대출 금리는 신용대출보다 높은 기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신용도에 따라 금리를 정하는 대출 원칙이 가계부채 규제로 무너지고 있지만 금융당국은 뒷짐만 지고 있다. 금융권이 규제를 틈타 대출 금리를 과도하게 올리고 있진 않은지 금융당국의 엄격한 감시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가계부채 겨눈 금융당국 칼날, 차주(借主)에 향해

15일 금융권에 따르면 지난 12일 기준 4대 시중은행(KB국민·우리·신한·하나)의 주택담보대출(주담대) 금리 상단은 4.839%로 신용대출 금리 상단인 4.76%를 추월했다. 은행권이 금융당국의 총량 규제를 어기지 않으려고 대출 규모가 큰 주담대 문턱을 높인 결과다. 주담대에 따라붙었던 저금리 상품이란 수식어는 무색해졌다.

총량 규제에 따른 대출 혼란은 다른 곳에서도 포착된다. 고신용자 대출 금리가 중신용자를 역전했고, 2금융권 주담대 금리는 1금융권보다 낮아졌다. 은행이 신용도 등에 따라 자체 설정할 수 있는 가산금리를 올리고 우대금리는 깎자 발생한 일이다.

대출 원칙이 뒤집힌 기현상은 금융당국의 책임이 크다. 금융위원회는 가계부채 증가세가 심상치 않자 올해 하반기부터 총량 규제를 강하게 적용하기 시작했다. 돈을 빌리려는 차주는 그대로인 가운데 은행권에 허용된 총 대출 자금은 묶였다.

이른바 '대출 초과 수요'가 나타나자 금융권은 총량 규제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은행권 재량인 가산금리를 올리면서 손해 보는 장사는 하지 않고 있다. "가산금리 폭리를 막아 달라"는 청와대 국민청원까지 등장할 정도다. 가계부채를 겨눈 금융당국의 칼날이 결국 금융 소비자 피해만 끼친 셈이다.

신성환 홍익대 경제학부 교수(전 금융연구원장)는 "금융당국이 총량 규제라는 첫 단추를 잘못 꿰자 대출 원칙은 훼손되기 시작했다"며 "은행 입장에선 대출 수요가 여전히 많다 보니 독점적 이윤을 챙길 수 있는 상황이 마련됐다"고 말했다.

"금융당국, 가산금리 산정 기준 점검 필요"

대출 혼란에도 금융당국 투톱인 고승범 금융위원장, 정은보 금융감독원장 모두 "시장에서 결정하는 대출 금리를 정부가 직접 개입하긴 어렵다"면서 강 건너 불구경이다. 이를 두고 '대출 시장 개입은 더 큰 혼란을 낳을 수 있다'는 원칙론을 내세우기에 앞서 시장 불안을 조성한 데 따른 자성과 대책 마련이 먼저라는 지적이 나온다.

문제는 앞으로다. 최근 은행권의 가산금리 확대, 우대금리 축소 움직임은 다소 꺾였으나 금융당국이 내년에도 총량 규제를 예고하고 있어 대출 혼란은 언제든 재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예방 차원에서 금융당국이 은행권이 대출금리를 필요 이상으로 높여 차주 부담을 키우고 있진 않은지 점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득의 금융정의연대 대표는 "총량 규제로 시장에 개입했으면서 금리는 손댈 수 없다는 금융당국 태도는 모순적"이라며 "대출금리 자체를 내리라고 강제할 순 없지만 금감원이 2019년 시중은행의 가산금리가 적절한지 살펴본 것처럼 비슷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조성목 서민금융연구원장은 "대출금리가 오르는 만큼 예금금리도 높아진다면 차주 불만이 지금처럼 크진 않을 것"이라며 "금융당국은 은행권 금리 산정 기준에 문제가 없는지 고강도 검사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경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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