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리반도체인 D램 시장에 '고점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1년 가까이 상승세를 이어 왔던 D램 가격이 지난달 급락하면서 제기된 전망이다. 실제 대만 시장조사기관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지난 10월 컴퓨터(PC)용 D램 범용제품(DDR4 8Gb)의 고정거래가격의 평균값은 3.71달러로, 전월(4.10달러) 대비 9.51% 급락했다. 이는 2019년 7월(-11.18%) 이후 최대 낙폭이다. 공급망 병목 현상에 따른 수급 차질을 우려, D램의 주요 수요처인 PC 업계에서 쌓아 둔 재고 물량이 늘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하지만 삼성전자를 포함한 메모리반도체 제조업계의 표정은 느긋한 모습이다. 믿는 구석도 있다. 내년부터 차세대 고속 메모리반도체인 'DDR5 D램' 시대의 본격적인 개막이 예고되고 있어서다. 특히 미세공정이 요구되는 DDR5의 경우엔 기술력을 갖춘 국내 메모리반도체 업계엔 오히려 기회가 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DDR는 국제표준화 기구가 채택한 고속 메모리 기술로, 현재 주력 제품은 2013년 나온 DDR4다. 지난해 7월 JEDEC가 DDR5 표준안을 확정했고, 이에 맞춰 글로벌 메모리 제조사들도 앞다퉈 DDR5 D램을 선보이고 있다. 이전 제품에 비해 용량과 속도가 배 이상 향상됐고, 전력 효율성도 30%가량 향상됐다. 가령 데이터 센터의 DDR4를 DDR5로 교체하면 연간 최대 1테라와트시(TWh=시간당 10억kW)의 전력을 아낄 수 있다. 이는 지난 한 해 서울 강북구에서 사용한 전력량을 웃도는 수준이다.
15일 업계에 따르면 인텔은 DDR5를 지원하는 최초의 PC용 중앙처리장치(CPU)인 '엘더 레이크'를 지난 4일 출시했다. 이에 맞춰 처음으로 PC용 DDR5가 시중에 나오긴 했지만, 아직까지 일반 소비자 체감도는 낮다. 인텔이 이번에 선보인 12세대 CPU가 고성능 PC 수요자를 겨냥한 제품이다 보니, 아직까지 일반 소비자의 수요가 미미해서다. 메모리반도체 제조사에서 대량 생산을 꺼리는 이유다.
업계에선 내년 2월 인텔의 신규 서버용 CPU '사파이어 래피즈' 출시를 기점으로 DDR5 D램 시대가 본격화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사파이어 래피즈는 DDR5 D램을 지원하는 최초의 서버용 CPU다. 서버용 D램은 메타(페이스북), 구글, 애플, 아마존 등을 포함한 글로벌 빅테크 기업이 데이터센터 서버 구축 시 들어가는 필수 반도체다. 호실적을 등에 업은 빅테크 기업의 최근 설비투자 분위기까지 감안하면 내년 서버용 DDR5 D램 교체수요는 급증할 것이란 게 증권가 안팎의 분석이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최근 PC용 DDR5가 나오긴 했지만 실제 업계에선 수요가 무궁무진한 서버 시장에 맞춰 제품 출시를 준비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업계에선 내년 상반기까지 점쳐진 DDR4 가격 하락도 DDR5의 세대교체로 상쇄될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최근 메타버스, 가상·증강현실(VR·AR) 등 첨단산업이 꽃피면서 차세대 D램 수요도 더 커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시장조사기관인 옴디아에선 전체 D램 시장 가운데 차지할 DDR5 비중은 2025년엔 40.5%까지 급증할 것으로 내다봤다.
DDR5 D램 사용처 역시 PC, 서버, 전기차, 모바일 등으로 계속 늘어나고 있다. 삼성전자도 최근 이런 추세에 맞춰 업계 최초로 극자외선(EUV) 공정을 적용한 14나노미터(1나노=10억분의 1m) 모바일용 D램(LPDDR5X)를 내놨고, 차기 스마트폰 제품에 신형 D램을 적용할 예정이다.
증권가에선 기술 성숙도가 가장 앞선 삼성전자가 DDR5 시장을 주도할 것으로 점치고 있다. 이승우 유진투자증권 센터장은 "삼성전자는 내년 DDR5로 차별화를 시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