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가난한 자의 구김살을 말할 수 있나

입력
2021.11.12 04:30
26면

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가난은 이들에게 디딤돌에 불과한 것일까.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의 어릴 적 사진을 두고 얼마 전 정치권에서 오간 공방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난달 7일 이재명 대선캠프 소속 인사가 페이스북에 공유한 사진이 발단이었다. 흑백 사진 속 더벅머리의 어린 이재명은 얻어 입은 듯 헐렁한 작업복 스타일 옷을 걸친 채였다. 어깨 선이 딱 맞는 카디건에 빨간 나비 넥타이가 야무진 어린 윤석열 사진과 확연한 대조를 이뤘다. 구태여 두 사진을 병렬한 의도는 분명했다. 하지만 성공한 시도였는지는 두고 볼 일이다. 당장 원래는 컬러였던 이 후보 사진을 극적인 대비 효과를 내기 위해 흑백으로 각색한 것 아니냐는 뒷말이 나왔다. “가난을 스펙, 패션으로 활용하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취약 계층을 욕보이는 것”(홍준표 대선캠프)이란 역풍도 불었다. 하지만 이 후보 측은 개의치 않는 듯하다. 얼마 전부터 캠프는 이 후보의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세밀화처럼 그린 웹 자서전도 연재한다.

얼마 뒤 국민의힘 대선주자 토론회에서 두 후보 과거 사진이 화제가 됐다. 원희룡 전 제주지사가 윤 후보(당시 후보 선출 전)에게 물었다. “평생 살면서 가난해본 경험이 있느냐”고. 원 전 지사는 “가난한 사람하고 생계를 같이해본 적 있느냐” “대통령이 되면 가난한 국민들 마음을 어떻게 이해하려고 하냐”고도 캐물었다. 그러면서 “나는 처절하게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중3 때부터야 집에 전기가 들어왔다”고 했다. 자수성가 이야기. 그가 진짜로 부각하려던 메시지였을 것이다.

가난을 안다는 원 전 지사는 역설적이게도 가난에 편견 어린 시선을 드러냈다. 같은 토론회에서 그가 한 발언이다. “(가난을 알아야) 가난 때문에 복수심에 불타고 사회에 대한 원망과 다른 사람에 대한 증오를 하는 사람도 녹일 수 있는 리더로서 철학이 나온다.” “어릴 때 유복하게 사는 사람은 오히려 성격에 구김새가 없이 밝고,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사람이 긍정적일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한다."

설혹 이런 통념이 있다 해도 정치 지도자가 공공연히 할 말인지 귀가 의심됐다. 가난하면 마음도 모났을 거란 편견을 덧칠할 수 있는 위험한 발언으로 들렸다. 풍족하게 자랐을 유력 정치인 자녀가 엮인 최근 사건 사고를 보자. 음주운전이 연이어 적발되자 급기야 경찰관을 때린 국회의원 아들, 화천대유에서 퇴직금 50억 원 대박을 터뜨리고도 떳떳하다는 또 다른 의원 아들, 부모 찬스를 극한까지 이용해 다른 학생의 입학 기회를 빼앗은 전직 장관 딸, 마약을 밀반입하다 적발된 전직 의원 딸 등. 누가 가난한 자의 구김살을 말할 수 있나.

가난을 꿈을 이루기 위해 밟고 일어설 수단으로 여기는 사이 현실의 가난에 대한 감수성이 무뎌진 것이 아니길 바란다. 가난은 스펙 삼기에는 여전히 절박한 문제다. 병원비 압박과 기약 없는 돌봄을 견디다 못해 인륜에 반하도록 강요받는 ‘간병 살인’이 지금 여기서 일어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한국은 기준 중위소득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돈을 버는 인구 비중이 6명 중 1명(16.7%)이며, 이는 OECD 37개국 중 네 번째로 높은 비율이다.

가난을 흑백 사진처럼 향유할 여유가 정치인들에게 있지 않다.

이성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