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돌려받을 전세대출인데 원금도 갚아야 한다니 부담이 너무 크네요.” 내년 결혼을 앞두고 전셋집을 알아보는 직장인 김모(32)씨는 은행에서 전세대출을 알아보다 깜짝 놀랐다. 정부의 실수요자 보호 대책에 전세대출 자체는 가능했지만, 예상치 못한 '원금 분할 상환' 조건이 따라붙었기 때문이다. 김씨는 "차라리 월세를 살아야 하는지 고민 중"이라고 토로했다.
정부가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에서 전세대출을 제외하고, 잔금대출을 중단 없이 지급하도록 하는 등 '실수요자 보호'를 은행에 주문했지만, 실수요자가 느끼는 은행 대출 창구 분위기는 이와 사뭇 다르게 돌아가고 있다.
금융당국이 제시한 가계 대출 증가율 억제 목표치를 채우기 위해 은행들이 전세대출과 잔금대출 심사를 이전보다 깐깐하게 진행하면서, 정작 돈이 필요한 실수요자들이 은행권 대출 문턱을 넘지 못하는 사례도 증가하고 있다.
7일 은행권에 따르면, KB국민은행은 최근 모든 신규 전세대출에 대해 ‘5% 분할 상환’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신규 전세대출 시 원금에 대한 이자뿐만 아니라 원금의 일부도 함께 갚아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2억 원을 전세대출(금리 연 3.5%)로 2년간 빌릴 경우, 기존에는 원금에 대한 이자만 매월 58만3,000원씩 갚으면 됐다. 그러나 이제는 원금의 5%(1,000만 원)에 해당하는 분할 상환금 41만6,000원도 매월 함께 갚아야 한다.
대표적인 실수요로 꼽히는 잔금대출 역시 각박해지기는 마찬가지다. KB국민은행을 필두로 은행들이 잔금대출의 대출 한도 기준을 ‘시세’가 아닌 ‘분양가’로 사실상 바꾸면서 대출 한도가 큰 폭으로 축소됐다. 부동산114 통계에 따르면, 서울의 전용면적 85㎡(33평형) 아파트의 경우, 대출한도가 1억 원 이상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때문에 청약 당시 예상한 시세를 기준으로 자금 계획을 세운 입주 예정자들은 큰 혼란을 겪고 있다. 수도권 아파트를 분양받은 한 입주 예정자는 "2년 전에는 가만히 있더니 이제와서 '분양가'를 적용하는 게 말이 되느냐"며 "모자란 돈을 메꾸려면 2금융권이라도 알아봐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최근 실수요자 보호 대책과 맞물려 고가 전세 보증 제한도 논란이 되고 있다. SGI서울보증보험은 초고가 전세 주택에 대해 전세대출 보증을 제공하지 않는 방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시중은행의 전세대출은 보증기관의 보증을 통해 취급되는데, 전셋값과 무관하게 보증을 해준 곳은 그간 SGI서울보증보험이 유일했다.
고가 전세 보증 제한이 현실화할 경우, 상한선을 넘은 전세대출 취급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서울 서초구 아파트에 전세로 입주 중인 직장인 김모씨는 "'내 집 마련' 대신 '자녀교육'을 택했는데 이제는 이마저도 불가능해지는 것 아닌지 불안하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금융당국은 실수요자 보호 원칙 아래 불필요한 대출은 막겠다는 입장이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실수요자가 전세대출, 잔금대출 등을 차질 없이 빌릴 수 있도록 한다는 원칙은 흔들림 없다"며 "대출 심사 강화는 꼭 필요한 만큼만 돈을 빌릴 수 있다는 점에서 실수요자 위주의 자금 공급과 같은 맥락"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