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Day'가 됐다. 정기연주회 날이다. 29일 오후 1시쯤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는 무대 준비로 정신이 없었다. 공연 시작까지 7시간이나 남았지만 무대 리허설이 3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었다. 무대 리허설은 오케스트라가 공연장에서 본 공연을 앞두고 실시하는 최후의 연습과정이다.
무대에서 더블베이스, 하프, 피아노 등 대형 악기들이 자리를 잡는 동안 공연 담당자들은 분장실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분장실은 지휘자와 단원들이 공연 시작 전, 공연 중간 인터미션 때 머물며 휴식을 취하는 곳이다. 주로 무대 뒤편(백스테이지)에 마련돼 있다. KBS교향악단 공연기획팀 직원들은 분장실에 다과와 마실 것 등을 가져다 놓으며 필요한 물건이 더 없을지 살폈다.
오후 1시 30분이 되자 단원들이 속속 공연장에 도착했다. 무대 리허설까지 시간이 꽤 남았지만 이미 악기를 꺼내 무대 위에서 연습에 돌입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특히 금관악기 연주자를 중심으로 관악기 단원들이 일찍부터 모습을 드러냈다. 오케스트라에서 관악기는 숫자가 많지 않고, 교향곡 등을 연주할 때 솔로 파트를 맡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실수를 하면 치명적인 터라 특히 긴장하는 편이다.
무대 조명과 소품이 완비되고 오후 3시가 되자 지휘자가 무대로 입장했다. 무대 리허설에서 얍 판 츠베덴은 이따 2부 공연에서 연주될 프로코피예프 교향곡 5번에 많은 시간을 쏟았다. 1부에서 연주할 베토벤 교향곡 5번(35분)에 비해 연주시간도 15분 가량 더 길고, 악기 편성도 훨씬 크다. KBS교향악단이 최근 들어 연주하지 않은 곡이어서 생소하기도 했다.
츠베덴은 최후의 리허설에서도 악기 파트 별로 꼼꼼히 보완할 점을 짚어냈다. 곡을 전반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연주하기 보다는 막히는 부분을 거듭해서 연습하는 식이었다. 츠베덴은 특히 입체적인 현악기 소리에 공을 들였다. "차량 뒤편의 엔진이 앞으로 밀어주는 포르쉐 스포츠카처럼, 소리도 뒤에서부터 단단하게 흘러 나올 때 이상적"이라는 철학 때문이었다.
무대 리허설은 예정된 마감 시간이었던 오후 5시를 훌쩍 지나 6시가 거의 다 돼서야 끝났다. 단원들은 기진맥진한 표정이었다. 지금부터 단원들은 저녁 식사를 하고 공연 때 착용할 의상을 갈아 입어야 한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복장은 그날 그날 다른데, 이날의 경우 흰 셔츠에 검은색 재킷으로 통일됐다.
한편 공연장 로비에서는 손님 맞을 준비로 바빴다. 공연 당일 공연기획팀 직원들이 주로 백스테이지를 책임진다면 홍보, 마케팅 업무를 담당하는 공연사업팀 직원들은 로비를 맡는다. 이들은 티켓 박스에서 보관된 티켓들을 관객에게 배부하고, 공연장을 찾은 주요 손님들을 맞는다. 이날 저녁 예술의전당 로비는 거장 지휘자를 보기 위해 발걸음을 한 관객들로 빼곡했다.
오후 7시 45분. 기자는 콘서트홀 무대 출입구 가운데, 업계 용어로 이른바 '상수'라고 불리는 곳에 있었다. 오케스트라가 공연할 정도의 대형 무대는 통상 2개의 무대 출입구가 있다. 객석에서 무대를 바라봤을 때 주로 지휘자와 협연자가 입장 및 퇴장하는 왼쪽 문을 '하수'라고 하고, 반대편 오른쪽 문을 '상수'라고 부른다. 1ㆍ2바이올린 등 무대 왼쪽 편에 있는 악기 연주자들은 '하수'로, 더블베이스와 첼로 등 오른쪽 연주자들은 '상수'를 통해 무대를 오간다.
'상수'에서 바순, 비올라, 첼로 등 연주자들은 공연 시작에 맞춰 입장을 기다리는 동안 자신이 맡은 파트를 조금씩 연습해 보며 긴장을 풀고 있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무대 경험이 많은 이들이지만 무대는 언제나 떨리는 공간이다. 오후 8시 정각이 되자 "입장하겠습니다"하는 무대감독의 사인과 동시에 '상수'의 커다란 문이 열렸다. 문 바깥으로는 객석에 가득 찬 관객들이 보였다. 이제 음악을 들려 줄 시간이다. 단원들이 위풍당당하게 입장하자 관객들은 힘차게 박수를 치며 환영했다.
지휘자 츠베덴이 포디엄에서 역동적인 비팅을 내리자 베토벤 교향곡 5번의 주제인 '운명의 동기'가 콘서트홀에 울려 퍼졌다. 나흘간 고된 연습을 통해 제련된 소리는 명징하고 장엄했다. 지구상에서 가장 유명한 교향곡이었지만 츠베덴만의 해석을 만나 베토벤 교향곡 5번은 완전히 새로운 음악으로 연주됐다. 객석에는 황홀감이 넘쳤다.
공연이 시작되자 '상수'와 '하수'에 있는 기획팀 스태프들은 모니터 화면을 응시했다. 백스테이지에서 무대를 직접 볼 수 없기 때문에, 무대 상황을 점검할 수 있도록 별도 설치된 카메라가 무대를 실시간으로 중계하고 있었다. KBS교향악단 공연기획팀 소속 전현정씨는 "공연이 무사히 시작되면 백스테이지 사람들은 비로소 한숨을 돌릴 수 있다"고 했다. 실제로 백스테이지는 웅장한 음악이 연주되는 무대와 달리 고요했다. 전씨는 "공연 담당자의 경우 항상 무대 뒤편에 있기 때문에 정작 객석에 앉아 공연을 감상해 본 적이 없다"며 "무대 리허설을 활용해 그나마 아쉬움을 달래고 있다"고 했다.
오후 8시 35분쯤 1부 공연이 끝났다. 15분간 인터미션이 주어졌다. 이때 악기 담당 단원은 무대로 나가 2부 공연에 필요한 정비를 한다. 기자도 유재식 단원을 따라서 의자와 보면대를 옮기며 무대 전환을 거들었다. 단원들이 퇴장한 무대는 여전히 1부 공연의 열기로 온기가 돌았다. 무대에서 바라본 객석은 광활했다.
오후 9시 40분쯤 2부 프로코피예프 교향곡 5번도 연주가 끝났다. 지휘자가 공연의 끝을 알리는 인사를 하자 객석에서 뜨거운 박수가 터져 나왔다. 츠베덴이 박수 세례를 받으며 무대 왼쪽 문으로 퇴장하자, '하수'에서 지휘자를 기다리던 직원들도 "브라보 마에스트로"를 외치며 환호했다. 지휘를 막 마친 츠베덴은 상기된 표정이었다. 그는 여전히 끝나지 않는 박수 소리를 들으면 세 차례 무대를 오갔다. 관객 호응에 보답하는 '커튼콜'이다. 무대에 나갈 때마다 츠베덴은 이날 공연에서 특히 활약한 단원들을 일으켜 세우며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공연이 완전히 끝나고 관객들도 돌아갔을 무렵 지휘자는 분장실에서 손님을 맞았다. 공연을 보기 위해 먼 걸음을 해준 이들과 인사를 나눴다. 츠베덴과 KBS교향악단은 다음날인 30일에도 대구에서 같은 프로그램으로 지방 투어 연주를 한다. 때문에 서둘러 숙소로 돌아가 휴식을 취해야 했다. 츠베덴이 예술의전당 출연자 출입구 문 밖으로 나오자, 그를 만나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기다리던 관객들이 소리를 지르며 반겼다. 공연으로 녹초가 됐지만 지휘자는 팬들에게 일일이 사인을 해주고, 함께 사진을 찍으며 보답했다.
츠베덴은 오후 10시 10분이 돼서야 차량에 탑승, 호텔로 이동했다. 비로소 KBS교향악단 제771회 정기연주회가 막을 내린 순간이었다. 2시간이 조금 안 되는 공연을 위해 한국을 찾은 지휘자부터,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물론 사무국 직원들 모두가 오랜 시간 구슬땀을 쏟았다. 이들은 밤낮 없이 기꺼이 자신의 삶을 일정 부분 내려놓았다. 오직 관객을 위해서였다. 공연을 보고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들은 힘을 얻고, 다음 공연을 준비한다. 공연은 그렇게 탄생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