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에 '계란 테러'는 호재? 진심 없다면 무용지물

입력
2021.10.3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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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계란 봉변'의 역사]
'전두환 옹호 발언' 윤석열 광주행 두고
"계란 맞아 지지층 결집하려는 것" 시각
이따금 '전화위복'되는 경우도 있지만
'민심 향한 진심' 없다면 계란도 소용없어

국민의힘 대선 경선 후보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다음달 2일 광주에 방문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 옹호 발언과 뒤따른 '개 사과'가 논란을 빚자 "광주를 방문해 상처있는 분들을 위로하겠다"고 밝힌 겁니다.

윤 전 총장은 앞서 19일 부산을 방문해 "전 전 대통령이 군사 쿠데타와 5·18만 빼면 그야말로 정치를 잘했다는 분들이 많다. 호남 분들도 그런 얘기를 한다"고 말했습니다. 논란이 일자 이틀 뒤 사과했지만 진정성이 없다는 비판이 따랐습니다.

사과 표명 이후 윤 전 총장이 돌잔치 때 사과를 잡은 사진, 사과 묘목 사진, 반려견 '토리'에게 사과를 건네주는 사진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계정에 잇따라 올렸기 때문입니다.



광주에서는 여전히 윤 전 총장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분위기입니다. 이용섭 광주시장은 25일 TBS 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해 "옹호 발언이 19일인데 2주 지나서 오겠다고 하는 것은 (다음달 5일 결과가 발표되는) 경선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한 선거 전략 아니겠나"고 말했습니다.

"(윤 전 총장이) 계란 맞으러 오는 것이고 봉변 당하러 오는 것으로 광주에서 탄압받는 모습을 보여 보수 진영을 결집시키려는 것"이라고 의구심을 드러냈죠.



정치인 계란 투척사(史)

이 시장의 말처럼 성난 민심은 유력 정치인에 계란 등을 '투척'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은 퇴임 후인 1999년 일본 출국길에 김포공항에서 붉은 페인트 계란에 맞았습니다. 'IMF 사태의 책임자인 김 전 대통령이 반성은커녕 망발로 통치권에 도전해 정부 기능을 약화시키고 경제 회생을 저해했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세 차례 대권에 도전했던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도 후보 시절 몇 차례 계란 세례를 받았습니다. 2002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TV토론회 참석차 광주를 방문했을 때, 2007년 무소속 후보로서 지역민심 대장정을 위해 대구 서문시장을 방문했을 때 등 입니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계란을 맞은 것은 알려진 것만 네 번입니다. 1990년 부산역 앞에서 '3당 합당'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2001년 대우차 부평공장에서, 2002년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전국농민대회 연설에서 그리고 대통령 퇴임 후인 2009년 대검찰청으로 향하던 그가 탄 리무진 버스에 계란이 날아왔습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시절 경기 의정부에서 유세차에 오르던 중 허리 부근에 계란을 맞았습니다. 계란을 던진 이는 "부패하고 정직하지 못한 이명박 사퇴하라"는 내용의 유인물을 뿌리다 체포됐죠.

모든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따금 '계란 테러'와 같은 극단적 방식이 나오는 건 '불통을 다스릴 방법이 없다'는 절망의 표출일지도 모릅니다.



"계란을 맞더라도 가야" 조언 나오는 이유

정치인들은 그러나 날아드는 계란을 부정적으로만 보지는 않는 듯합니다. 되레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았죠. 진심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방법 내지 지지층 결집의 수단으로 봤다는 얘기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2년 세 번째 계란을 맞으면서도 연설을 이어갔습니다. "달걀을 맞아 일이 풀리면 얼마든 맞겠다"는 말을 남기면서요. 이후 "정치하는 사람들이 한 번씩 맞아줘야 국민들 화가 좀 안 풀리겠나"고 웃어넘기기도 했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일화는 특히 유명합니다. 박 전 대통령은 2006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오세훈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 선거 유세장에 지지방문했다가 문구용 커터칼에 얼굴을 다치는 아찔한 사고를 당했습니다.

이후 병상에서 "대전은요"라고 선거 판세를 챙겼다는 일화가 알려지며 동정 여론이 크게 일었습니다. 한나라당이 지방선거에서 압승하는 계기가 마련됐다는 평가들이 나왔죠.



그래서인지 계란을 불사하고서라도 얽힌 민심을 풀어야 한다는 조언이 종종 등장합니다. 가장 최근엔 윤 전 총장 캠프에 합류한 하태경 의원이 "가급적 빨리 가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걸 감수해야 한다"고 말했고요.

2016년 4·13 총선 직전엔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SNS를 통해 문재인 대통령(당시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에게 "계란을 맞더라도 (광주에) 가야 한다"며 광주 방문 결정을 환영했습니다. 문 대통령의 방문은 '텃밭' 광주에서의 '반문(문재인)' 정서를 돌파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광주 8개 선거구 모두 국민의당이 차지하며 결과를 뒤집진 못했습니다.



"동정표 얻으러 오나" 음모론 일기도

동시에 음모론이 일기도 합니다. 1997년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대선 후보의 광주 유세에 대해 정동영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대변인은 "한나라당이 지역 감정을 자극하고 밀가루 뒤집어쓰기, 계란 세례 등 자작극을 획책하고 있다는 정보가 있다"고 주장했죠.

앞서 "계란 맞으러 오느냐"는 이용섭 시장의 발언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는 "윤 전 총장이 광주에 안 오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만약 온다면 경찰로 하여금 철저히 보호하게 할 것", "무관심, 무표정, 침묵의 '3무'로 대응하자고 시민들에게 당부할 것"이라고도 말했죠.



계란을 맞았다고 해서 '만사형통'한 건 아닐겁니다. 계란을 맞았든 맞지 않았든 진심어린 사과였나가 중요하겠죠.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단 한 마디의 사죄도 하지 않은 전 전 대통령에겐 최근에도 법정 밖에서 계란이 날아들고 있습니다. 또한 계란 이후 지지층 결집 효과를 누린다 한들 분열의 정치를 보여주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겁니다.

윤주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