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가 '고발 사주' 의혹 핵심 인물인 손준성(47) 검사를 구속하는 데 실패했다. 체포영장이 기각되자 곧바로 구속영장 카드를 꺼낸 공수처의 승부수가 제동이 걸린 것이다. 야당의 대선 경선 일정을 고려해 수사를 서둘렀던 공수처는 체면을 구기게 됐다.
서울중앙지법 이세창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26일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등 혐의를 받는 손준성 검사의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을 거쳐 "피의자에 대한 출석 요구 상황 등 이 사건 수사진행 결과 및 피의자에게 정당한 방어권 행사의 범위를 넘어 증거를 인멸하거나 도망할 우려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며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또한 "심문 과정에서 향후 수사에 성실히 임하겠다는 피의자 진술 등을 종합하면 현 단계에서 피의자에 대해 구속의 필요성 및 상당성이 부족하다고 판단된다"고 덧붙였다. 피의자의 방어권을 보장할 필요성이 큰 반면, 구속의 필요성이 충분히 소명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본 것이다.
법조계에선 법원 결정에 대해 대체로 ‘상식적 판단’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공수처의 구속영장 청구가 당초 통상적 수사절차를 벗어난 무리한 측면이 있었다는 것이다.
공수처는 이달 4일부터 손 검사와 출석일자 조율을 시도했지만 손 검사가 '변호인 선임'을 이유로 일정을 계속 늦추자 조사에 응할 생각이 없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영장판사는 이를 ‘불응’이 아니라 ‘조율 과정’으로 봐야 한다고 해석했다. 법원이 이날 기각 사유로 "(손 검사가) 향후 수사에 성실히 임하겠다고 했다"고 적시한 이유다.
영장 기각을 두고 법원이 통상적 신병 확보 방법으로도 손 검사 조사가 가능하다고 본 것이란 해석도 나온다. 수사기관은 피의자가 출석 일자를 정당한 사유 없이 지연하려고 할 경우, 이를 기록으로 남기면서 법원에 체포영장을 청구해 발부받는다. 손 검사의 경우처럼 체포영장이 기각되면 보강 조사를 통해 재청구하는 게 일반적이란 뜻이다. 판사 출신의 한 법조인은 "수사 비협조를 이유로 피의자를 곧바로 구속하는 선례를 남기는 것에 대해 법원이 부담을 느꼈을 것"이라고 밝혔다.
공수처가 영장심사 하루 전날 손 검사 측에 영장 청구 사실을 알린 것도 방어권 침해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란 해석도 나온다. 수사기관은 구속영장을 청구한 당일 피의자 측에 이를 통보하는 게 일반적이다. 법원장 출신의 한 변호사는 "최근 구속영장 발부의 중요한 기준은 피의자에게 방어권 기회를 주느냐 여부"라고 전했다.
손 검사의 구속영장이 기각되면서 김진욱 공수처장을 향한 비판도 예상된다. 고검장 출신의 한 변호사는 “이 정도 중대 사안이라면 당연히 공수처장 의중에 따른 결정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김 처장은 21일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손 검사 등을 겨냥해 "사건 관계인들은 대부분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공인이다. (사건과) 무관하다는 분들은 (공수처에) 출석해서 떳떳하게 밝히라"고 요구했다.
1호 구속영장 청구 대상자인 손 검사의 신병 확보에 실패하면서, 또 다른 핵심 인물인 김웅 의원 조사 등 향후 공수처 수사에도 차질이 예상된다. 공수처는 김 의원을 이달 말~11월 초 조사한다는 계획이지만 자진 출석할지는 불투명하다. 손 검사의 경우처럼 조사 일정을 두고 김 의원과의 지난한 조율 과정도 예상된다.
손 검사는 지난해 4월 총선을 앞두고 윤석열 전 총장 직속인 대검찰청 수사정보정책관(현 수사정보담당관)으로 재직하면서, 윤 전 총장과 측근들을 공격하던 범여권 인사들을 겨냥한 고발장을 미래통합당 측에 건네는 과정에 개입한 혐의를 받고 있다. 공수처는 김웅 당시 미래통합당 후보(현 국민의힘 의원)와 제보자 조성은씨가 고발장과 첨부자료를 텔레그램 메신저로 주고받는 과정에서 기록된 '손준성 보냄' 문구를 단서로 수사에 착수한 뒤, 당시 대검 소속 검사와 수사관들을 소환 조사했다.
공수처는 "아쉽지만 법원 판단을 존중하며 추후 손준성 검사에 대한 조사와 증거 보강 등을 거쳐 구속영장 재청구 여부를 판단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