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26일 청와대 상춘재에서 50분간 차담을 가졌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정치적 중립 논란을 의식해 대장동 의혹 등 정치 현안에 대한 대화는 없었다. 다만 '현재 권력'인 문 대통령과 '미래 권력에 성큼 다가선' 이 후보의 관계를 반영하듯 오가는 말속에 적지 않은 '뼈'가 있었다.
이날 만남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시작됐다. 문 대통령은 이 후보를 '우리 후보'라고 부르며 한껏 힘을 실어줬다. 정권재창출을 위해 집권여당 후보를 예우한 것이다. 그러면서 역대 최대 규모(604조 원)로 편성한 내년도 예산안을 화제에 올렸다. 차기 정부가 사용할 예산임을 강조한 것은 '포스트 문재인'으로서 이 후보를 배려한 대목으로 읽힌다.
▶문 대통령="내년도 예산은 사실상 우리 정부보다 다음 정부가 쓸 몫이 훨씬 많은 것 아닙니까. 다음 정부가 주로 사용할 예산이라는 점을 많이 감안해 편성했습니다."
▷이 후보="네."
▶문 대통령="우리 이 후보님은 2017년 대선 때 저하고 민주당 경선에서 경쟁했고 경쟁을 마친 후에는 함께 힘을 모아 정권 교체를 해냈습니다. 그동안 대통령으로서, 경기지사로서 함께 국정을 끌어왔었는데 이제 나는 물러나는 대통령이 됩니다."(웃음)
▷이 후보="아직 많이 남았습니다."(웃음)
2017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이 화제에 오르자, 이 후보도 속마음을 넌지시 밝혔다. 당내 비주류이자 비문재인계로 분류되는 이 후보는 당시 경선 1위 후보였던 '문재인 때리기'를 적극 펼쳤고, 친문 지지층들의 눈 밖에 났다. 이 후보가 현재 경선 후유증으로 '원팀' 구성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배경 요인 중 하나다. 문 대통령은 이러한 이 후보의 상황을 이해한다는 취지로 반응했다.
▷이 후보="대통령을 보면 꼭 이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지난 대선 (경선) 때 제가 좀 모질게 한 부분에 대해선 사과 드립니다."
▶문 대통령="이제 1위 후보가 되니까 그 심정을 아시겠죠." (웃음)
이 후보는 대화 내내 문 대통령을 추켜세우며 문 대통령은 물론 친문진영의 마음을 얻는 데 주력했다. 문재인 정부의 안정적인 마무리에도 동참하겠다는 뜻을 밝히면서다.
▶문 대통령="코로나19 위기는 우리 능력을 재발견하는 기회가 됐습니다. 물론 국민의 협조 덕분에 이루어진 것이지만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 후보="우리 정부의 능력과 국민 협력이 한데 어우러져서 이뤄진 성과 같습니다. 앞으로도 우리 문재인 정부가 역사적인 정부로 남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문 대통령="끝까지 많이 도와주십시오. 코로나19 위기 때문에 디지털 전환이 빨라지고 기후위기 대응도 가속화하는 역사적 위치에 처해 있습니다. 현 정부보다 다음 정부가 지는 짐이 더 클 것 같습니다."
▷이 후보="그 짐을 제가 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웃음)
농담조의 답변이었지만 이 후보의 직진 본능이 드러난 대목이다.
문 대통령은 2012년, 2017년 대선 재수를 한 '선배'로서 조언과 당부를 잊지 않았다. 이 후보도 당장 문 대통령과의 차별화보다 계승을 강조하면서 코드를 맞추었다.
▶문 대통령="대선은 결국 국민들이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지도자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대선 과정에서 정책을 통한 선의의 경쟁을 부탁 드립니다. 변화의 속도가 빠른 시대라 정책도 과감하게 하는 게 좋다는 게 개인적 생각입니다."
▷이 후보="가끔 제가 놀라는 건데, 대통령과 제 생각이 너무 일치해 놀랄 때가 있습니다."
문 대통령은 이 후보에게 건강 관리를 당부하기도 했다.
▷이 후보="지난번 만났을 때보다 얼굴이 좋아지신 것 같습니다."
▶문 대통령="이제는 피곤이 누적돼 도저히 회복이 되지 않습니다. 현재도 이가 하나 빠져 있는데, 이건 국가기밀입니다. 대통령 자리는 일종의 극한직업인데, 일 욕심을 내면 한도 끝도 없으니 체력 안배를 잘 해야 합니다."
이철희 청와대 정무수석은 회동 후 브리핑에서 의제와 관련해 "대장동의 '대'자도 나오지 않았다"며 "사전에 이 후보 측과 선거와 관련한 얘기는 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대장동 의혹은 물론 부동산 문제, 남북관계, 검찰 수사 등은 언급하지 않은 채 확장재정의 필요성 등 민생 현안에 대한 대화만 나눴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김기현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문 대통령이 이 후보를 만난 것은 대장동 의혹에 면죄부를 주는 것"이라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