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영화 상영장이 바로 KBS강릉 옆인 줄 몰랐어요. 와 보니 여기서 촬영했던 기억이 나서 너무 반가웠어요. 정말 20년이 빨리 지나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봄날은 간다’를 찍을 때만 해도 이 영화가 20년이 지나도록 많은 사랑을 받을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20년 후까지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생각했을 정도였으니까요,”
23일 저녁 강릉대도호부관아 안에 마련된 임시 극장에서 열린 영화 ‘봄날은 간다’ 20주년 상영회를 찾은 허진호 감독은 20년 만에 영화 촬영지를 다시 방문한 소감을 이렇게 밝혔다. 이번 행사는 제3회 강릉국제영화제 측이 기획한 특별 이벤트였다. 영화 대부분이 강릉을 비롯해 속초, 삼척, 동해, 정선 등 강원도 일대에서 촬영했다는 데 착안해 마련됐다. 이날 20주년 상영회에는 허 감독 외에 주연배우 유지태, 김형구 촬영감독, 김선아 프로듀서, 조성우 음악감독,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한 신준호 작가가 무대에 올라 영화 상영 전 관객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JTBC 드라마 '구경이'를 촬영 중인 주연배우 이영애는 촬영장 대기실에서 찍은 영상으로 현장에 참여하지 못한 아쉬움을 건넸다.
2001년 9월 개봉한 ‘봄날은 간다’는 허진호 감독이 데뷔작 ‘8월의 크리스마스’ 이후 내놓은 영화로 21세기 한국 멜로영화를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다. 당시 추석 연휴를 앞두고 개봉했으나 같은 날 극장에 걸린 경쟁작 ‘조폭마누라’에 밀려 흥행(약 79만 명)에선 실패했다. 하지만 평론가들에게 극찬을 받았고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으며 지금도 걸작 멜로영화로 추앙 받고 있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라면, 먹을래요?’ 같은 대사는 한때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제작진은 이날 자리에서 ‘봄날은 간다’가 각자에게 남긴 특별한 의미를 소환했다. 대체로 그 의미는 ‘행복’이란 단어로 수렴됐다. 자신들의 ‘봄날’이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상우 역을 연기한 배우 유지태는 “그 당시엔 촬영에서부터 마지막 후반작업까지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했다”며 “제겐 너무나 소중한 기억”이라고 말했다. "사람은 순간의 기억으로 평생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지금도 그때 느꼈던 행복을 느끼기 위해 영화를 꿈꾸고 있고 앞으로도 다시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요.”
음악을 지휘했던 조성우 음악감독은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친구였던 허진호 감독이 만드는 영화의 주제의식이나 표현하고자 하는 감정이 내 선천적 음악 스타일과 닮아 있는데 ‘봄날은 간다’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정서”라면서 “이 영화의 음악을 만들 때 가장 행복했고 가장 섬세하고 열정적이며 순수했다”고 회상했다.
김형구 촬영감독도 “지금까지 촬영한 30편 이상의 영화 중 가장 행복하게 찍은 작품을 고르라면 당연히 ‘봄날은 간다'”라고 했다. “영화 촬영 현장은 전쟁터인 경우가 많습니다. 감독과 마음이 안 맞아서 갈등이 생기기도 하죠. 허진호 감독님은 원래 성격이기도 하지만 늘 차분하게 주시하면서 별 말을 하지 않았어요. 다른 영화에 비해 테이크가 길다 보니까 커트에 대한 부담이 적어 천천히 생각해보며 관찰하면서 찍을 수 있는 여유가 있었어요. 제가 잡은 화면을 보곤 감독님이 늘 ‘됐습니다. 슛 가죠’라고 했는데, 저를 신뢰한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더 힘이 나서 열심히 찍을 수 있었죠.”
제작진은 오래도록 회자되는 명대사와 관련한 뒷이야기도 전했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는 대사는 첫 테이크 촬영 후 폐기될 뻔했으나 유지태의 고집 덕에 되살아났다. “감독님이 사실적이고 진실한 걸 좋아해서 대사가 어색하면 견디지 못했어요. 그래서 원래 대본의 80~90% 정도는 현장에서 새로 각색된 겁니다. 그런데 감독님이 그 대사를 안 했으면 좋겠다고 하시는 거예요. 제가 어색하지 않게 연기하겠다고 김선아 프로듀서와 함께 감독님을 설득했죠.”(유지태) “애초부터 시나리오에 있는 중요한 대사였고 연기하기 어려운 대사였어요. 그런데 첫 테이크 찍어보니 어색하더라고요. 배우가 어색하면 안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 빼려고 했는데 김선아 프로듀서가 이건 무슨 일이 있어도 찍어야 한다고 해서 다시 촬영했어요. 그런데 연기가 너무 좋더군요.”(허진호)
제작진은 ‘봄날은 간다’가 2001년이기에 만들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고 입을 모으기도 했다. “요즘은 모두 디지털 카메라로 촬영하는데 그 당시엔 필름으로 찍었어요. 멜로영화를 만드는 현장에서 한 신을 한 테이크로 찍는 어려운 방식을 이어가면서도 정답 없는 촬영을 했어요. 사전에 정답을 갖고 현장에 가는 게 아니어도 된다, (미리 모든 걸 준비하지 않고) 현장에서 만들어도 충분히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던 시기였죠. 그때 전 알고 있었어요. 제 봄날이 여기 있다는 것을요. 이야기해보니 다들 그 순간이 행복했구나 싶어 저 역시 기쁩니다.”
‘봄날이 간다’는 찰나의 사랑을 그린 멜로영화인 동시에 누구나 겪는 삶의 한 조각을 담은 작품이다. 조성우 음악감독은 이를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것에 대한 그리움과 아련함, 그로 인한 슬픔”이라고 표현했다. “살면서 다시 반복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20년이 지나도록 그때의 행복과 순수함, 뜨거움은 다시 오지 않더군요. 이젠 다시 오지 않을 것 같다는 데서 오는 슬픔이죠.”
허진호 감독은 이날 관객과 대화를 마치며 “언젠가 제 봄날이 다시 올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봄날은 간다’ 같은 영화를 다시 만들고 싶다”고 했다. 유지태는 늦가을의 한기를 견디며 영화 상영을 기다리는 관객에게 “영화에는 세월을 넘어서는 특별한 가치가 있는 것 같다”면서 “숫자와 자본, 부질없는 세상을 넘어서는 소중한 기억, 순간, 행복, 사랑이 있는데 제가 느꼈던 감정을 공감해주셨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