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편제' '장군의 아들' 제작 충무로 거물 이태원 대표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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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24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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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영화 ‘서편제’(1993)와 ‘취화선’(2002), ‘장군의 아들’ 시리즈 등을 제작하며 한국 영화 재부흥의 발판을 마련했던 이태원 전 태흥영화 대표가 24일 별세했다. 향년 83세.

태흥영화에 따르면 이 전 대표는 이날 오후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고인은 지난해 5월 낙상사고로 이 병원에 입원한 후 줄곧 치료를 받아왔다.

1938년 평양에서 태어난 고인은 6ㆍ25전쟁으로 가족과 떨어진 후 어려운 성장기를 거쳤다. 부산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로 올라와 명동에서 주먹 생활을 하기도 했다. 1959년 한 무역업자의 권유로 ‘유정천리’를 제작하며 영화계에 첫발을 디뎠으나 흥행에 실패하며 곧바로 충무로를 떠났다. 이후 경기 의정부에서 건설과 미군 군납업으로 재산을 모았다. 고인의 파란 많던 젊은 시기 삶은 본인이 제작하고 임권택 감독이 연출한 ‘하류인생’(2004)에 담겨 있다.

고인은 1973년 의정부의 한 건물을 인수하며 영화업계에 다시 뛰어들었다. 건물에 영화관을 운영하면서 경기ㆍ강원 지역에서 영화 배급업을 시작했다. 1984년 태창영화사를 인수한 후 태흥영화로 이름을 바꾼 후 영화제작업에 뛰어들었다. 고인은 ‘만다라’(1981)를 본 후 꼭 함께 일하고 싶었던 임 감독과 창립작으로 김지미 주연의 ‘비구니’ 제작에 돌입했다. 하지만 ‘비구니’는 불교를 비하한 내용으로 잘못 알려지면서 불교계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제작이 무산됐다.

고인은 당시 에로물 유행에 편승해 만든 ‘무릎과 무릎 사이’(1984), ‘어우동’ ‘뽕’(1985)이 잇달아 성공하면서 충무로 주요 흥행술사로 급부상했다. ‘돌아이’(1985)와 ‘기쁜 우리 젊은 날’(1987) 등 화제작을 내놓으며 거물 제작자로 빠르게 자리 잡았다.

‘비구니’로 맺은 임 감독과의 인연은 ‘아제 아제 바라 아제’(1989)로 이어졌다. 이 영화는 배우 강수연에게 모스크바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기며 한국 영화를 세계에 알리는 데 일조했다. 고인과 임 감독은 ‘아제 아제 바라 아제’ 이후 ‘장군의 아들’(1990)을 합작하며 한국 영화계 간판 콤비가 됐다. ‘장군의 아들’은 당시 한국 영화 역사상 최고 흥행작 자리에 오르며 3편까지 만들어졌다. 고인은 임 감독의 ‘서편제’(1993)에 당시로선 거금인 제작비 6억 원을 대기도 했다. ‘장군의 아들’ 흥행에 대한 보은 차원이었다. 흥행이 어려울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서편제’는 서울 단성사에서만 100만 관객이 들며 ‘장군의 아들’ 흥행 기록을 넘어섰다. 고인과 임 감독은 동명 베스트셀러 소설을 바탕으로 한 ‘태백산맥’(1994)을 합작하기도 했다.

고인은 임 감독과 함께 한 ‘춘향뎐’(2000)을 한국 영화 역사상 최초로 칸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올렸다. 2002년에는 임 감독의 ‘취화선’으로 칸영화제 감독상을 한국 영화로는 첫 수상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한국 영화의 재부흥을 알리는 낭보였다. 하지만 고인은 ‘하류인생’이 흥행에 실패하면서 영화 제작에서 손을 떼기 시작했다. 2005년 투자 유치가 어렵다며 ‘천년학’(2007) 제작을 포기하면서 임 감독과의 협업도 끝이 났다. 오동진 영화평론가는 “한국의 곤란했던 시대를 뚫고 새로운 영화 세상을 만들려고 노력하고 풍운아처럼 살았던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영화 37편을 제작한 고인은 1993년 옥관문화훈장, 2003년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아들 철승ㆍ효승ㆍ지승씨, 딸 선희씨 등이 있다. 3남 지승씨는 영화 프로듀서 겸 감독이다. 빈소는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26일 오전 10시다. (02)2227-7500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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