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북한에 공부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북한 지도부가 당 간부들과 주민들에게 ‘경애하는 김정은 동지’의 말씀을 깊게 학습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입니다. 지난달 30일 우리의 국회와 비슷한 북한 최고인민회의에서 나온 김정은 국무위원장 겸 노동당 총비서의 시정연설 내용을 빠짐없이 살펴보고, 읽으면서 그 뜻을 깊이 받아들이라는 겁니다.
공부에 열중하는 북한 주민들에게 과제가 또 하나 늘었습니다. 김 위원장이 10일 노동당 창건 76주년에 맞춰 기념 강연회를 열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당 창건일에 연설한 건 처음입니다. 앞서 7월에는 북한 건군 이래 처음으로 ‘대원수’인 김 위원장이 전국 군 지휘관들을 불러 모아 강습회를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최고지도자가 연단 위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지만, 김 위원장의 ‘가르침’은 올 들어 부쩍 많아졌습니다. 1월 제8차 당대회 연설을 포함해 10여 번이나 직접 연설하거나 회의를 주재했습니다. 거의 한 달에 한 번꼴로 목소리를 낸 셈입니다. 그가 ‘강연 정치’에 골몰하는 이유는 왜일까요.
몇 가지 배경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탓에 예전처럼 현장을 둘러보면서 당 간부들에게 일일이 과업을 지시하는 게 어려워졌습니다. 코로나19가 지구촌을 공포에 떨게 하기 전인 2019년만 해도 김 위원장은 북한 전역을 누볐습니다. 군 부대 시찰과 신형전술유도무기 시험을 참관한 것은 물론 관광지구 건설장, 기계종합공장, 발전소 등을 방문한 사례가 40여 차례에 이릅니다. 하지만 지난해 7월 코로나19를 막기 위해 국경 문을 꽁꽁 닫고, 방역 단계를 최고 수준으로 높인 뒤에는 확 달라졌습니다. 올해 김 위원장이 현지 시찰에 나선 횟수는 다섯 번에 불과합니다. 자연스레 주민들과의 접촉면도 줄어들 수밖에 없지요.
결국 김 위원장의 대중연설은 이런 단절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고육책’으로 보입니다. 회의를 소집하고, 연단 위에 올라 지도하는 모습을 수시로 노출하면서 대중과의 간접적 만남이라도 늘리려는 것입니다. 잦은 연설에는 “김정은 체제는 건재하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북한에서 최고지도자의 ‘한마디’는 반드시 체득해야 하는 과제입니다. 김 위원장의 발언을 매주 지역ㆍ단위별로 모여 외우고 토의하는, ‘학습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죠. 당연히 조선중앙TV 등 북한 대내매체가 그의 육성 메시지를 송출할 때마다 주민들은 경각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북한 지도부도 이를 잘 알고 있어 더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일수록 김 위원장의 입을 빌려 무게를 싣는 방식을 곧잘 씁니다. 최근 북한 체제의 최대 위협인 주민들의 사상적 와해와 국가경제발전 5개년 계획을 김 위원장이 자꾸 거론하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실제 그는 얼마 전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사상 결속’과 ‘국방ㆍ경제계획 이행’을 강조했고, 10일 다시 언급했습니다. “8차 당대회가 설정한 5개년 계획 기간을 앞당겨 강산을 변모시키는 대변혁의 5년으로 되게 하라” “당 일꾼이라면 사상에서 투철해야 한다” 등 주민들을 독려하는 기색이 역력합니다.
김 위원장의 연설문은 시정연설 때처럼 각급 당과 근로단체 조직, 무력기관, 사회안전기관 등에 출판ㆍ배포될 것입니다. 그의 생각과 비전을 당 간부들과 주민들에게 주입하고, 국가 전체가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도록 강제하는 과정입니다.
주민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젊은 지도자상’을 부각하고 싶은 속내도 느껴집니다. 1인자가 솔선수범해 여러 사업을 챙기는 구도를 연출해 당 간부들에게 긴장감을 불어넣고, 일반 주민들한테는 ‘애민정신’을 드러내는 기회로 삼고 있는 것이지요. 특히 10일 연설에서 김 위원장은 “당 책임 일꾼(간부)들은 고상한 도덕품성을 지니고 인민들을 존중하며 자기를 무한히 낮춰야 한다”고 주문했습니다. 다분히 코로나19 이후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는 민심을 염두에 둔 발언으로 해석됩니다.
몇 달 사이 급격한 변화를 겪은 김 위원장의 외모도 이런 효과를 극대화시켰다는 평입니다. 한때 체중이 140㎏에 육박했던 것으로 알려진 그는 지난달 9일 정권수립 73주년 기념 열병식에서 부쩍 야윈(?) 얼굴로 등장했고, 10일 당 창건일 기념연설에서도 비교적 날씬한 체형을 유지했습니다. 식량 위기가 갈수록 가중되는 상황에서 최고지도자 스스로 끼니도 거르면서 민생 고통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선전하려는 의도가 엿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