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의 임기 말 ‘비핵화 협상’ 재개 시도가 미국의 강경한 태도에 막혀 좀처럼 활로를 뚫지 못하고 있다. 문 대통령이 띄운 ‘종전선언’ 제안에 북측은 남북 통신선 복원을 통해 일단 호응하는 모양새를 취했으나, “북한이 협상 테이블로 돌아오는 게 우선”이라는 미국의 원칙에는 균열을 내지 못한 것이다.
미국을 방문 중인 서훈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12일(현지시간)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만나 최근 한반도 정세를 놓고 의견을 교환했다. 특히 서 실장은 지난달 유엔총회에서 종전선언을 앞세운 문 대통령의 비핵화 협상 재개 구상을 상세히 설명했다. 정부 고위 당국자는 이날 “서 실장의 방미를 통해 조 바이든 미 행정부가 우리의 종전선언 입장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됐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정부의 긍정적 반응과 달리 설리번 보좌관은 종전선언 제안에 명시적 지지를 보내지는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양측 협의 결과를 담은 백악관 보도자료에도 종전선언 관련 내용은 없었다.
남북은 최근 문 대통령의 종전선언 제안을 신호탄으로 각자 다른 방식으로 미국을 압박했다. 북한은 지난달 24일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 명의의 담화를 통해 “남측의 종전선언 제안은 흥미 있고 좋은 발상”이라고 관심을 보인 뒤, 8월 한미연합군사연습(한미훈련) 당시 중단됐던 남북 통신연락선을 이달 초 복구했다.
동시에 북한은 극초음속 미사일 등 지난달에만 4차례 미사일 시험발사를 거듭하며 이를 ‘도발’로 규정한 한미의 ‘이중 기준’과 ‘대북 적대시정책’을 철회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미국이 대북제재를 완화하지 않으면 핵ㆍ미사일 개발을 지속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인 한편, 남측도 미국을 더욱 강하게 설득해 달라는 메시지로 해석됐다. “이제 (대북)제재 완화도 검토할 때가 됐다(정의용 외교부 장관)”면서 북측 입장에 힘을 싣는 듯한 한국 정부의 의중이 공공연하게 나온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풀이가 지배적이다.
실제 정부는 지난달 30일 북핵 수석대표 협의, 5일 한미 외교장관 약식회담에 이어 이번 ‘서훈ㆍ설리번 회동’까지 체급을 높여 가며 미국을 설득했지만, 바이든 행정부는 “북한과 언제든 만날 수 있다”는 기존 입장만 되풀이했다. 대북제재 이완, 종전선언 등 남북의 요구사항은 북한이 협상에 복귀한 뒤에나 다뤄질 이슈라는 함의가 깔려 있다.
주목되는 건 북한의 선택이다. 북한은 그간 대미 협상에서 우위를 갖기 위해 무력 시위 수위를 높이는 전략을 써왔다. 미국이 당장 대북 유인책을 내놓을 가능성이 낮은 상황임을 감안하면 과거 패턴을 반복할 수도 있다. 반대로 현 정부 임기가 끝나가는 만큼 북한이 정상회담 등 남북 주도로 정세 전환을 도모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전직 고위 외교관은 “미국을 압박하기 위해 남측을 계속해서 활용하겠다는 게 북한의 노림수로 보여 대형 군사도발을 감행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