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스토리] 당신은 악마가 아니라 범죄자일 뿐이다

입력
2021.10.30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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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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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 Words : 여성의 언어

살아온 환경, 살아온 방법, 살아온 시간이 달라도,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 연대는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추적단 불꽃, 저서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에서

Her View : 여성의 관점


<27> 가해자는 감옥으로,
피해자는 일상으로 (10월 21일자)

안녕하세요. 허스토리입니다. 이번 주는 '박사방' 주범 조주빈의 확정 판결 관련 내용을 준비했어요. 본문을 모두 읽고 나면, 이 판결의 의미와 앞으로 우리가 나아갈 방향이 조금 더 또렷해질 것이에요!

■ '박사방' 조주빈, 확정 판결을 받았다고?

지난 14일, 미성년자를 포함한 여성들을 협박해 성착취 영상물을 제작하고 판매한 텔레그램 대화방 '박사방'의 운영자 조주빈(26)에게 징역 42년이 확정됐습니다. 42년이란 형량,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물론 피해자들의 인간성을 짓밟은 반사회적 범죄 행위를 감안하면 어떤 형량도 부족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 판결은 대체로 디지털 성범죄를 엄단해야 한다는 시민들의 요구에 사법부가 화답했다는 평가가 주를 이룹니다. 일례로 박사방의 전신인 'N번방'을 물려받은 '켈리' 신모씨만 보더라도, 성착취물 소지·판매 혐의로 지난해 겨우 징역 1년을 선고받는데 그쳤거든요.

■ 아무리 화 내도 바뀌는 게 없어.

혹시 이렇게 좌절하고 계신 분 계시다면, 느리지만 조금씩 세상은 바뀌고 있다고 꼭 말해주고 싶어요. 지난해 3월 '텔레그램 N번방' 국민청원이 271만명 이상의 동의를 얻는 등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경각심이 커졌죠. 지난해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상습적인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제작 범행에 대해 최대 '29년 3개월 징역형'을 선고할 수 있도록 양형기준을 강화했어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신종 전문적 수법을 창출해 범행하거나, 다수인이 역할을 분담해 조직적으로 범행했을 때, 범행을 주도적으로 계획하거나 실행을 지휘하는 핵심적 역할을 했을 때 등은 '특별가중처벌'을 받게 됐어요.

■ 조주빈 재판은 뭐가 달랐어?

이번 사건은 검찰이 디지털 성범죄 사건을 '조직범죄'의 한 유형으로 보고, 범죄집단조직·가입·활동죄를 적용해 기소한 첫 사례였어요. 범죄단체(집단)조직죄는 그 자체로 범죄이자, 법원이 형을 가중해 선고할 수 있는 요소로 적극적으로 법을 해석한 결과로 읽힙니다. 재판 과정에서 조주빈 등이 범행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조직범죄는 아니었다"고 주장한 까닭입니다. 하지만 1·2심은 모두 '박사방=범죄집단'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대법원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간 디지털 성범죄에 맞서 싸워온 활동가와 시민단체의 끈질긴 문제 제기와 공론화도 법조계의 인식 변화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 이제 끝이야?

그렇지 않아요. 조주빈은 또 다른 강제추행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거든요. 현행법상 가중 요소가 있을 때 유기징역형의 상한은 50년인데요. 추가로 기소된 이 재판에서 실형이 확정되면, 징역 42년에 형량이 더해질 수 있어요. 그뿐만 아니라, 조주빈의 공범인 '부따' 강훈이 3심을 앞두고 있고(2심서 징역 15년형) 강제추행으로 추가 기소된 상황입니다. 또, 공범 남경읍의 2심도 진행 중입니다. 박사방은 아니지만 N번방의 주범인 '갓갓' 문형욱은 2심에서 징역 34년형을 받고 상고해 대법원 심리가 진행 중이에요.

■ 그 방에 있었던 모두가 공범이다

박사방 주범에 대한 재판과 처벌은 진행 중이지만, 피해자들의 일상 회복은 요원합니다. 어디엔가 성착취물은 여전히 떠돌고 있을 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N번방 방지법'의 일환으로 여러 법안이 통과됐는데요. 제도적 사각지대가 남아 있지만, 입법 결과로 불법 촬영물이나 아동·청소년 성착취물을 소지,구입,시청만 해도 처벌할 수 있게 됐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디지털 성착취물을 소비하는 '수요자들'도 가해자라는 인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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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 Story : 여성의 이야기

2020년 대한민국을 뒤집은 N번방 사건의 중심엔 언론인을 꿈꾸던 20대 여성 '불'과 '단'이 있었습니다. 취업을 위해 '탐사 심층 르포 취재물' 공모전 준비를 하다가 텔레그램 성착취방에 우연히 입장하게 된 건데요. 취재를 위해 정신이 혼미해지고 며칠 동안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을 수준의 참담한 성착취물을 보며, 이들은 텔레그램에서 일어나는 일을 신고하고 적극적으로 공론화하기로 마음먹습니다.

이 책은 N번방을 세상에 알린 용감한 언론인 '추적단 불꽃'의 취재기이기도 하지만,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성 '불'과 '단'의 성장기이기도 합니다. "아들로 태어났어야 했는데"라는 말을 들으며 자란 불,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매니저의 '오피스 와이프' 제안을 받은 단. 신문사에서 인턴으로 기사를 쓰면서도 여성 혐오에 동조하지 않기 위해 혐오와 차별을 조장하지 않으려 분투하는 불과 단. 이들의 생각을 따라 읽으며, 이런 한 사람 한 사람의 분투가 모여 지금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늘 허스토리는 책의 한 문단을 인용하며 마무리 할게요. 디지털 성범죄 엄단을 향한 한 발자국의 진전에 자축하면서 말이죠! "누군가는 왜 그리 힘들게 인생을 사냐고 묻기도 한다. 왜 별것도 아닌 일을 예민하게 받아 들이냐고. 웃기는 말이다. 내가 불편하고 싶어서 불편한가. 여러 사회문제를 인지하고 불편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예민하게 구는 것'으로 여겨선 안 된다. 누군가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는 일상이 다른 사람에게는 쟁취해야만 하는 것일 수 있다. 나의 예민함이 사회를 좀더 나은 방향으로 이끈다고 믿는다."

※ 본 뉴스레터는 2021년 10월 21일 출고된 지난 메일입니다. 기사 출고 시점과 일부 변동 사항이 있을 수 있습니다. 뉴스레터 '허스토리'를 즉시 받아보기를 원하시면 한국일보에서 뉴스레터를 구독하세요!



이혜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