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 강간살해 사건' 피해자 정부 상대 헌법소원 각하

입력
2021.10.06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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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재 "배상할 법 없는 한 국가 배상 의무 발생 안해"
피해자 사망해 인격권 침해 등 심판절차 종료 결정
영화 '7번방의 선물'로 정원섭씨 사연 널리 알려져

이른바 ‘파출소장 딸 살인사건’으로 알려진 춘천 강간살해 사건 당시 경찰 강압수사 등으로 누명을 썼던 고(故) 정원섭씨가 명예 및 피해회복 조치를 하지 않았다며 정부를 상대로 헌법소원을 제기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헌법재판소는 정씨가 “피해 및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한 적절한 조치 및 화해를 적극 권유하지 아니한 것은 위헌”이라며 정부 부작위를 문제 삼은 헌법소원심판 사건에서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심판절차를 종료했다고 6일 밝혔다.

경찰은 1972년 9월 춘천경찰서 소속 파출소장 딸(당시 9세) 살해사건의 범인으로 자주 다니던 만화방 주인인 정씨를 지목해 검거했다. 정씨는 혐의를 부인했으나, 강압수사에 못 이겨 “내가 죽였다”며 혐의를 인정했고, 경찰은 증거물 및 증언을 조작했다. 검찰로 송치된 후 정씨는 혐의를 재차 부인했지만 재판에 넘겨져 1987년까지 15년 옥살이를 했다.

하지만 2007년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경찰은 증거를 조작해 정씨를 강간살인 사건 범인으로 조작했고 위법성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검찰과 법원은 청구인의 피해 및 명예를 회복할 수 있도록 노력할 책임이 있다”고 결론 내렸다. 위원회는 “국가는 피해자 및 가족에게 사과하고 화해를 이루는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하고 형사소송법이 정한 바에 따라 재심조치를 취하는 게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정씨는 2008년 재심을 청구했고, 대법원은 정씨의 모든 공소사실을 무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정씨의 사연은 영화 ‘7번방의 선물’로 세간에 알려졌다.

정씨와 유족들은 무죄 확정판결 이후 수사기관의 불법행위에 따른 손해를 배상하라며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냈지만, 법원은 손해배상 청구 기간이 지났다는 이유로 기각했다. 정씨는 국가가 정씨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거나 가해자에게 화해하도록 권유하지 않은 점, 국가배상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점을 문제 삼아 헌법소원을 청구했다.

헌재는 올해 3월 정씨가 사망한 점을 근거로 국가가 정씨의 명예회복을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부분에 대한 심판절차를 종료했다. 정씨의 인격권과 존엄성은 유족에게 물려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심판 대상이 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국가가 적절한 배상을 하지 않았다는 주장에 대해선 재산권과 국가배상청구권 등 정씨의 권리가 유족들에게 승계된 것으로 봤지만, 전원일치 의견으로 각하 결정을 내렸다. 정씨에게 피해를 배상할 별도의 법이 없는 한, 과거사정리법이나 유엔 고문방지협약만으로는 배상 의무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이유다.

유가족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은 부분과 유족들과 가해자 간 화해를 적극 권유하지 않은 부분도 각하했다.

안아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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