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민족? 베트남엔 왜 '단돈 2000원' 짝퉁 CD가 판칠까

입력
2021.10.07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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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음악 시장의 씁쓸한 현실

편집자주

국내 일간지 최초로 2017년 베트남 상주 특파원을 파견한 <한국일보>가 2020년 2월 부임한 2기 특파원을 통해 두 번째 인사(짜오)를 건넵니다. 베트남 사회 전반을 폭넓게 소개한 3년의 성과를 바탕으로 급변하는 베트남의 오늘을 격주 목요일마다 전달합니다.


베트남식 발라드 '볼레로(Bolero)'는 참 구슬프다. 특유의 부드러운 '음 꺾기'는 마치 한국의 트로트처럼 단조의 풍미를 더 짙게 한다. 별 생각 없이 들어도 충분히 좋은 이 노래들은 시적인 가사의 의미까지 알면 더 빠져드는 묘한 매력이 있다. 그래서일까. 베트남인의 일상에는 볼레로가 항상 흐른다. 현지 택시나 그랩(차량 공유서비스)을 타도, 하노이의 맥주 거리와 다낭의 미케 해변을 거닐어도, 그 구슬픈 가락은 예외 없이 귓가에 맴돈다.

베트남인의 노래 사랑은 청취에만 그치지 않는다. 이름 없는 선술집에 앉은 소시민부터 외교 환영 만찬장에 선 유명 정치인까지, 볼레로 한 곡 정도는 기본으로 각자 완창해야 제대로 된 만남을 가진 것으로 생각한다. 6일 현지 시장조사기관 'Q&Me'의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베트남인 76%가 "매일 음악을 즐긴다"고 답했다. 거리낌 없이 스스로를 '음악의 민족'으로 칭하는 게 괜한 말은 아닌 셈이다.

"노래는 인민의 공공재 아냐?"

피할 수 없으면 부딪혀야 하는 법. 그 흔한 볼레로 한 곡조를 못 뽑아 무안했던 날들을 지우고자 4일 하노이의 한 레코드 가게에 들렀다. 그러나 설레는 마음으로 매장 안에 들어선 순간, 곧바로 이질감이 몰려왔다. 정품 CD는 진열장 상단에 몇 개만 있을 뿐, 대부분의 자리는 딱 보기에도 조악한 불법 복제 '짝퉁' CD로 가득 차 있었다.

정품 CD는 20만~50만 동(약 1만~2만5,000원), 짝퉁은 4~8만 동(약 2,000~4,000원)의 가격대가 형성돼 있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확산 사태로 영업이 잠시 중단돼 그렇지, 재래시장에선 여전히 2만 동(약 1,000원)짜리 짝퉁 CD도 손쉽게 구할 수 있다고 한다. 70만 동(약 3만5,000원)에 달하는 프리미엄 CD보다 자그마치 35배나 싸다.

아직 저작권법 체계를 갖추지 못한 베트남이기에, 짝퉁 판매와 구매에 대한 처벌 역시 미미하다. 레코드 가게에서 만난 대학생 쯔엉(가명·22)은 오히려 "차에서 들으려 사는 건데 무슨 문제가 있냐"며 "(짝퉁 CD는) 불법이 아니라 선택 사항일 뿐"이라고 당당히 말했다. 옆에 있던 동년배 친구 안(가명)은 한술 더 떴다. 그는 "한국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베트남에서 노래는 인민을 위한 공공재"라며 뾰로통하게 쏘아붙였다.

음악 창작물 보호에 대한 인식이 낮다 보니 시장의 발전도 더디다. 글로벌 음악산업 수익이 코로나19 사태를 맞으며 급증한 것과 달리, 베트남은 지난해 200만 달러(약 22억 원)가량 증가한 4,900만 달러(약 581억 원)에 머물렀다. 인구 9,600만 명 가운데 '매일 노래를 듣는다'고 답한 7,000여만 명이 1년간 음원 구매에 평균 800원도 안 썼다는 얘기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코트라) 호찌민 무역관은 "선뚱 등 최근 젊은 인기가수들은 CD 앨범을 한 번도 발매하지 않고 활동한다"며 "짝퉁 CD 유통의 힘으로 콘서트가 역홍보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게 지금의 베트남"이라고 지적했다.

‘코로나 역특수’ 스트리밍 시장도 '글쎄'

그나마 남은 희망은 음악 스트리밍(온라인 실시간 재생) 시장이다. 작년부터 이어진 중앙정부의 강력한 봉쇄 정책으로 공연과 CD 현장 구매가 어려워지면서, 역으로 비대면 음악 감상이 늘어난 효과가 매출 상승으로 이어지는 모습이다. 실제로 베트남 실물 음반 관련 수익이 2017년 970만 달러에서 지난해 400만 달러로 반토막 나는 동안, 스트리밍 시장은 2,970만 달러에서 4,060만 달러로 37%가량 성장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미래가 마냥 밝지만은 않다. 베트남 음원 스트리밍 시장 점유율 1·2위 업체인 'Zing MP3'(59%)와 '냑꾸어뚜이'(34%)가 자국 음악은 물론 K팝 등 해외 음악까지 무료로 전곡을 듣거나 음원 파일을 다운로드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마련해 뒀기 때문이다. 심지어 Zing MP3는 요금제와 상관없이 모두 320kbps의 고음질을 제공하고 있다. 굳이 현지인들이 유료 회원으로 전환할 이유가 없다는 얘기다.

게다가 온라인 음악 서비스도 저작권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눈에 드러나는 짝퉁 CD 유통도 잡지 못하는 허술한 관리 체계가 온라인상에서 불법 공유되는 수만 곡의 저작권 침해 앞에서도 전혀 힘을 못 쓰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최근 4년 동안 베트남 다운로드 수익과 디지털 음원 매출은 시장 성장과는 반대로 20만~100만 달러가량 줄어들었다.

호찌민에서 활동 중인 현지인 가수 A씨는 "스트리밍 사이트 '탑 100'에 올라도 나에게 떨어지는 수익은 일정하지 않다"며 "공짜 서비스가 애플뮤직 등 해외 경쟁사의 현지 진출은 막을 수 있겠으나, 그 시간에 아티스트는 굶고 시장은 기형적으로 변할 뿐"이라고 한탄했다.

K팝 시장도 위험권... "저작권 침해 1000건"

베트남 청년층에서 폭발적 인기를 끌고 있는 K팝의 피해도 상당하다. 한국저작권위원회 베트남사무소(KCC)에 따르면, 지난해 현지에서 발생한 K팝 온라인 저작권 침해 사례는 1,000건이 넘는다. 이 중 86%가 즉시 삭제돼 심각한 피해 누적은 피했지만, 사전 검열 장치가 없는 이상 물리적 모니터링을 통한 사후 관리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박인기 KCC 소장은 "다행히 오프라인에서의 K팝 앨범 불법 복제 침해는 줄어드는 양상"이라며 "장기적 관점에서는 베트남 유관기관과의 협력을 강화해 올바른 저작권 체계를 이식하고 인식을 제고시키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밝혔다.

하노이= 정재호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