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대통령 말한 대로 왜 안 됐을까

입력
2021.10.04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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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빨리 결정하자" "속 터지고 열불난다"
채근하고 질책하고 매일 아침 토론했다는데
과도한 이념 접근, 능력 부족으로 성과 못 내

얼마 전까지 청와대 대변인을 지낸 강민석씨가 회고록 ‘승부사 문재인’을 출간한 것은 이례적이다. 통상 정권이 끝난 뒤 펴내는 관례와 달리 임기가 8개월이나 남아서다. 아무튼 그간의 내밀한 사정을 편린이나마 엿볼 수 있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강 전 대변인은 청와대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대통령의 언어’ 중 하나가 ‘빨리빨리’였다고 밝혔다. 그가 처음 참석한 회의에서도 문 대통령은 “빨리 결정하자”는 말을 수차례 했다고 한다. 밖에서 알고 있었던 문 대통령의 스타일과는 딴판이었다고 덧붙였다.

문 대통령의 지나치게 신중한 태도와 때로는 답답하게 느껴지는 결정은 ‘고구마’라는 별명이 상징한다. 대표적인 예로 윤석열 검찰총장과 추미애 법무부 장관의 충돌로 국정 전반이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갔던 1년 동안 문 대통령은 침묵을 지켰다. 그때는 왜 ‘빨리빨리’가 안 됐을까.

강 전 대변인은 문 대통령이 정책 집행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직설적 표현을 써가며 참모들을 강하게 질책했다고 밝혔다. “한 번도 야물딱지게 한 적이 없다” “말아먹을 일 있습니까” ”재탕에, 삼탕에, 맹탕에” 마스크 대란 때는 “정말 속이 터지고 열불이 난다”고도 했다고 한다. 이런 설명에도 괴리감이 느껴진다.

문재인 정부의 아킬레스건은 부동산 문제다. 수십 차례나 부동산 대책을 쏟아냈으나 천정부지로 치솟는 집값을 잡지 못했다. 이 기간 대통령이 무용지물이 된 부동산 대책에 대해 장관과 청와대 참모들을 꾸짖었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다. 정작 육두문자를 쓰면서까지 질책해야 할 것은 부동산 문제 아니었나. 문 대통령은 지난 5월 기자회견에서 “죽비를 맞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뒤늦은 후회를 남겼다.

코로나19 백신 공급도 마찬가지다. 강 전 대변인은 지난해 12월 백신 부족 문제가 불거지자 “오래전부터 청와대 회의에서 백신 물량 확보를 지시해왔다”며 관련 메모를 공개했다. 하지만 그 지시는 다른 국가들보다 한참 늦은 뒤였다. 일찌감치 대통령이 백신 부족에 대해 심각하게 질책했더라면 사정은 훨씬 나아졌을 것이다. 문 대통령은 최근 유엔 연설을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백신이 들어온 시기가 좀 늦어 초기 진행이 늦어진 측면이 있다”고 처음으로 시인했다.

이해할 수 없는 건 또 있다. “청와대에서 대통령과 참모들의 티타임이 4년여 동안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진행됐다”는 강 전 대변인의 설명이다. 보통은 한 시간 이상, 길어질 때는 두 시간 넘게 국정 현안을 논의했다고 한다. 백신을 접종한 날에도 휴식을 취하지 않고 돌아오자마자 티타임을 진행했다고 했다. 이처럼 대통령이 매일같이 주요 정책 상황을 파악하고 점검했는데 왜 결정이 늦어지고 혼란이 반복됐는지 납득하기 어렵다.

문 대통령은 애써 토론하고, 서두르고, 질책했는데도 왜 박한 평가가 나오는지 되짚어봐야 한다. 무엇보다 국정 모든 현안을 이분법적 시각으로 재단한 것이 문제였다. 적폐청산, 검찰개혁, 최저임금, 일자리, 부동산 등 주요 과제에서 실용적 접근보다 이념적 편가르기에 치우쳤다. 리더가 핵심을 꿰뚫지 못하면 국정은 표류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정작 갈등을 풀고 문제를 해결해야 할 곳에서는 물러서 있던 게 아닌가.

지금으로선 다음 대통령도 이런 운명을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상당수 유권자는 현 대선후보들의 자질과 역량은 거기서 거기라고 판단하고 오로지 진영에 유리한 후보를 선택한다는 입장이다. 누가 되어도 국민 절반의 반대를 안고 출발해야 하니 가시밭길은 피할 수 없다. 현 정치체제를 이대로 유지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시기다.

이충재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