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를 문명사적 관점에서 쉽게 풀어낸 에세이 ‘벌거벗은 미술관’을 최근 펴낸 양정무 교수는 올해 상반기 내내 지자체들이 벌였던 이건희 미술관 유치 경쟁을 이렇게 돌아봤다. 지자체가 주민들에게 뛰어난 문화재와 미술품을 감상할 기회를 주려고 노력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국가에 기증한 ‘이건희 컬렉션(소장품)’을 품지 못했다고 지역에 좋은 미술관과 박물관이 들어서지 못할 이유는 없다는 이야기다. 27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에서 양 교수에게 ‘국민을 위한 미술관’을 만들 방법을 들어봤다.
양 교수는 지자체들이 기존에 만들어놓은 시설부터 활성화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술관들이 지역에 이미 존재하는 우수한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기록(아카이빙)하는 한편, 이것을 바탕으로 이야깃거리들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주장이다. 양 교수는 “말하자면 어떤 카드를 가졌는지 미술관들 스스로도 잘 모른다는 이야기다. 매번 서울만 본다. 이번 이건희 컬렉션 유치전도 마찬가지다. 지역에서 모범 사례가 많이 나와야 한다”라고 설명했다.
지자체들이 이건희 소장품 유치처럼 단발성 사건에만 매달리기보다 평소에 시설에 대한 투자를 늘려야 한다는 지적도 잇따랐다. 양 교수는 “대개 지자체장들은 건물을 짓는 것에만 관심이 있고 인력 보강에는 별 관심이 없다”면서 “큐레이터들은 대부분 비정규직이고 처우도 좋지 않다. 정규직은 관리직뿐이다. 대체 왜 그럴까?”라고 되물었다. 이어 양 교수는 “이번에도 이건희 소장품 유치를 신청한 여러 기관들을 보면 (해당 지역에) 이미 좋은 작가들이 많다. (지자체가) 전문적 식견을 갖고 길게 가야 한다. 미술관과 박물관이 지자체의 보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흩어진 구슬들을 꿰어서 보물을 만들려면 일단 어떤 구슬들이 있는지 알아야 한다. 아카이빙과 연구인력에 대한 투자가 중요한 이유다. 양 교수는 '벌거벗은 미술관'에서 설명했던 영국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의 핑크 플로이드 전시(2017년)를 예로 들었다. 전통과 권위를 자랑하는 박물관이 록 밴드를 주제로 공간을 마련한 것이다. 양 교수는 “핑크 플로이드라는 1970년대의 BTS와 같았던 그룹을 소개하면서 의상부터 무대 디자인까지 크레디트(상세정보)를 다 달았다. 굉장히 많은 연구 아래서 전시가 나오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양 교수는 최근 국내 미술관들과 연예인들이 협업하는 현상 역시 이야깃거리를 지속적으로 만들어나가려는 새로운 시도라는 관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양 교수는 이건희 소장품에 목매는 지자체들이 거꾸로 생각해볼 필요도 있다고 설명했다. 예산을 투자해서 시설과 인력을 강화하는 활동은 지금도 지자체가 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양 교수는 “이건희 컬렉션을 두고 개인이 했던 것(수집 활동)을 왜 국가는 하지 않았느냐는 비판도 나온다”면서 “개인이 하는 것을 국가나 지자체가 왜 못 하겠나. 이건희 컬렉션이 자극제가 된 거다. 이건희 컬렉션을 바라볼 게 아니라 그와 비슷한 것들이 주변에 굉장히 많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