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연이 있길래 나한들을 목을 부러뜨려서 파괴하였던 것일까? 절은 불탔고 불상은 땅속에 묻힌, 창령사의 마지막 순간을 발굴자들은 처참한 광경으로 상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인간의 염원과 욕망 사이에 이러한 몰문화(没文化)적인 교차점이 있음을 확인하는 작업이었을 것이다.
두 해 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창령사 오백나한전’을 진행하면서 수백 가지의 미소와 표정에 매료된 사람들을 보았다. 우리의 마음을 이렇게 어루만져 주는데 왜 그렇게도 무자비한 사건이 있었단 말인가?
이 질문은 앞으로도 답을 얻기는 어려울 듯하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아마도 우리나라 고대 불상 가운데 이보다 더 대중에게 친근하게 접근할 수 있는 불상은 없을 것 같다. 두 구의 반가사유상과 함께 SNS에서 가장 많이 사진이 등장하고 있으니 불교적인 휴머니즘이 가지는 예술적인 생명력을 알 수 있다.
오백나한의 고향인 강원도 영월을 찾아 평창에서 국도로 접어들었다. 그 전시회 이후 오랫동안 벼르던 일을 드디어 해내는 기분이었다. 창령사에 들렀다 서울로 돌아오면서 확인한 것이지만, 제천으로 가는 고속도로에서 단양 어성천 방향으로 이동하는 길이 더 빠를 것 같았다. 창령사 간판을 길가에서 힐끗 보고 지나쳤더니 쨍한 햇살 아래 짙은 녹색의 수박이 깔려 있는 밭 옆의 좁다란 농로를 위험하게 오르게 되었다. 더운 여름의 한낮 정적이 골짜기를 진공으로 만들고 있어서, 학창시절 무협지에서 보던 사건이 발생하기 직전의 이상한 분위기의 한 장면 같았다. 오늘날은 잘 닦인 큰 길에서 멀지 않은 위치지만 과거에는 절터의 이름, 즉 창령사(蒼嶺寺: 깊고 머나먼 절)를 실감하는 곳이었을 것이다.
산으로 오르는 길이 더욱 급해지는 산모롱이에서 ‘창령사지’라고 적혀 있는 나무간판이 반갑게 등장한다. 손바닥만 한 간판에는 퇴색한 연등이 하나 걸려 있다. 좁은 골짜기 급한 길을 수백 미터 오르니 가건물의 절집들이 나타났다. 집들 뒤로 새로 만든 작은 법당이 있고 널찍한 잔디마당이 가꿔져 있었다. 생각보다 높은 곳에 절이 위치해 있고, 절터 또한 비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절은 발굴에서 ‘창령’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면서 기록으로 전하던 창령사임이 확인되었다. 창령사 절터가 자리한 곳은 속설에 ‘무덤치 절터’라고 불리던 곳으로, 고대 기록에 나오는 석선산(石船山: 지금의 초로봉으로 짐작)의 7부 능선 높이에 있다. 급한 산골짜기 사이로 안개가 올라오는 날이면 아마도 이곳은 구름 속에 신선이 된 느낌을 받을 것이다. 절터에서 하나 놀란 것은 산꼭대기 부근인데도 비가 온 영향인지 맑은 물이 콸콸 흘러나오는 샘이 마당 한가운데 있다는 점이다. 절터의 북쪽은 암맥이 절벽을 이루고 드러나 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절터의 풍수로 보면 이곳은 기도처나 공부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절터가 세상에 나타나게 되는 과정이 한편의 드라마다. 이 절터의 소유자이자 오백나한을 발견한 김병호씨의 부인은 아직도 원주에서 무당을 하고 있단다. 부인은 이유 없이 몸이 계속 아팠는데, 선몽(先夢)을 받고 이곳에서 기도를 했더니 몸이 씻은 듯이 좋아져 땅을 구입하고 절터를 닦게 됐다는 설명이다. 이 깊은 산속에서 사라진 절터를 계시받았다는 것 자체가 ‘전설 따라 삼천리’에 나올 수 있는 이야기다. 김씨도 절터에서 산신할머니의 이미지를 보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리고 이 절터가 영험한 것은 아마도 영월 사람들도 알았던 것 같다.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창령사의 발굴은 김씨가 이곳에 집을 짓는 과정에서 땅구덩이에서 큼직하고 두루뭉술하게 생긴 돌덩어리들을 파낸 것이 발단이었다. 절의 중앙에 흐르는 샘물에 씻어 보니 얼굴과 옷을 표현한 모습들이 나타났다. 바로 나한상이었다. 선몽을 꾸고 이곳에 들어온 김씨 내외로서는 엄청난 희열이었을 것 같다. 그렇게 하여 강원문화재연구소가 2001년과 이듬해 두 차례 절터 발굴을 진행하였고, 현재 강원도기념물 81호로 지정되었다. 발굴에서 수습된 부처의 개수는 300구가 넘는다. 아마도 한 자리 발굴에서 가장 많은 수의 부처상이 발견된 경우일 것이다. 그중에는 석가모니불과 함께 미래의 부처인 미륵보살(彌勒菩薩)과 과거불의 대표인 제화갈라보살(提華鞨羅菩薩)로 추정되는 불상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오백나한 가운데 나머지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절터에 들어차 있는 건물 때문에 조사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라서 발굴에서 얻어진 자료에서 절터의 역사나 나한상의 연유를 파악해볼 수밖에 없다. 고고학의 재미는 유물이나 유적이 완벽하게는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고, 그래서 상상할 수 있어 좋다는 점이다. 물론 앞으로 확정적인 증거들이 나오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임은 당연한 일이다.
나한. 도를 깨쳐 부처의 세계에 들어간 나한들은 중생이 사는 곳에 살면서 세상의 소리를 듣고 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번뇌를 끊을 수 있도록 돕는다. 그래서 오백나한의 얼굴들은 다른 불교 조상들과는 다르게 인간적인 표정을 하고 있고, 세상의 온갖 번뇌에서 해탈하는 다양한 이야기를 암시하는 경우가 많다. 경북 영천시 은해사의 오백나한은 화강석 위에 채색한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창령사의 오백나한은 화강석 거친 표면에 밴 미소와 다양한 감성의 표정이 보는 이에게 섬세하고 따뜻하게 다가가는 것이 큰 매력이다. 오백나한의 얼굴에 깃든 오백 가지의 다른 미소와 표정들은 결국 희로애락을 뛰어넘은 우리 군상들의 표현이 아닐까? 화난 표정조차도 천진스러운 모습으로 보는 이의 마음을 씻어주고 있다면 이를 제작한 장인은 이미 그 도의 경지에 있었을 법하다.
나한들의 모습을 보면 표정뿐 아니라 이들이 입고 있는 옷의 다양한 양식에도 놀랄 만하다. 오백 구가 각기 다른 옷을 입고 있다고 생각하면 오백나한전은 부처들의 패션쇼라고 할 만하지 않을까. 자세도 그렇지만 옷도 어깨를 벗은 모습, 한쪽으로 걸친 모습, 양쪽 어깨를 다 덮은 모습, 모자를 쓴 모습, 허리띠를 한 모습 등 각양각색이다. 스님의 장삼을 보면 그게 그것 같은데, 나한들의 옷은 다양하게 표현되었다. 아마도 세상의 온갖 모습에서 부처로 갈 수 있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발굴에서 수습된 유물 중에는 12세기 송나라에서 사용하던 숭녕중보(崇寧重寶)도 있고 청자들도 보인다. 모두 고려시대의 것들이 틀림없다고 추정된다. 그렇다면 오백나한은 언제 만들어져서 봉안되었을까? 돌을 이용해 오백나한을 조성하려면 상당한 재력이 필요했을 것이고, 절절한 동기가 있었을 것이다. 봉안 시기를 알게 된다면 그 동기도 추정 가능할 수 있다. 발굴에서 많은 수의 분청사기 조각들이 수습되었는데 이는 조선 초기, 대체로 15세기 후반의 것으로 보인다. 나한을 조각한 양식적인 편년으로 보아도 대체로 그와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15세기의 후반과 16세기 초를 전후해 일어난 이 지역의 주요 사건은 1457년에 있었던 단종 유폐와 죽음일 것이다. 단종이 죽고 나서 이 지역 유지인 엄흥도(嚴興道)가 시신을 수습해 장사를 치른 것이나 전설로 전해지는 이 지역 주민들의 단종에 대한 극진한 정서를 미루어 볼 때, 이 지역에 사는 누군가는 무엇이라도 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단종을 기리기 위해 시일이 지난 후 지역 토호의 후예들이 한양 권력자들의 눈에 잘 띄지 않도록 깊은 산 좁은 정상의 작은 절에 모신 것이라고 상상하면 안 될까? 피지도 못하고 억울하게 죽어간 어린 왕이 내세에서 나한들과 극락왕생하라는 뜻으로 조성하지 않았을까? 밤에는 절터에서 영월 읍내의 불빛이 내려다보인다는 김씨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더욱 그런 생각을 떨치기 힘들었다. 기대가 섞인 상상이다.
중국 항주 영은사(靈隱寺)의 오백나한상 중에는 마조(馬祖) 스님의 스승이 되는 신라의 왕자 무상(無相) 스님의 상이 있다. 그러고 보면 창령사의 오백나한 중에도 단종의 얼굴이 들어 있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이곳을 방문하던 날 텅 빈 절터를 이리저리 살피고 내려오다 밭일하고 돌아오는 김씨를 만나 전설 같은 발견 과정을 들었다. 영월로 유배된 단종은 오죽 답답했는지 ‘하늘이 귀머거리인가, 애달픈 이 하소연 어이 듣지 못하나(天聾尙未聞哀訴)...’라고 읊었다. 오늘날 오백나한들은 아마도 세상의 온갖 고민을 들어 주러 절터에서 하산하였으리라 상상해보는 것은 현세인의 고민이 큰 탓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