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다양한 모습으로 생성과 소멸을 거듭한다. 그 과정에서 도심을 지나는 철로는 주로 공원으로 변신한다. 폐철도 부지가 긴 모양을 한 탓에 산책로로 안성맞춤이다. 서울의 경의선 숲길이 그렇고, 광주 푸른길공원, 대구 선공원이 그 예다. ‘철의 도시’ 경북 포항에도 폐철길을 활용해 거듭난 공간이 있다. 포항 그린웨이(Greenway). 도시마다 하나쯤 갖고 있고 철길 숲과 다를 바 없는 곳에 ‘공원’ 대신 붙은 ‘녹색 길’이라는 명칭에 고개를 갸웃거릴 법하다. 그러나 들여다보면 그 이유가 어렴풋이 와 닿는다. 포항의 강과 바다, 포항을 일으켜 세운 용광로의 불, 쇠 위에 핀 예술을 연결하는 길이다. 숲길이란 이름으로 이들을 오롯이 담는 데 무리가 있다.
그린웨이는 남구 효곡동에서 시작한다. 이 길은 포항의 젖줄 형산강과 이어지고, 반대편인 북구 우창동 인근은 깊고 푸른 동해와 닿는다. 특히 길이 6.6㎞ 기찻길을 따라 빼곡히 심긴 꽃과 나무 사이로 철의 도시 포항의 대표축제인 스틸아트페스티벌에 출품됐던 조형물이 곳곳에 설치돼 유명 미술관 못지않은 볼거리를 제공한다. 지하수 관정을 찾다 발견돼 4년째 활활 타오르는 천연가스 불꽃, 철길에서 등산로를 따라 연결된 작은 산 위에서 내려다보는 영일만, 시가지 풍광은 오로지 포항 그린웨이를 걸어야만 볼 수 있는 것들이다.
그린웨이는 남구 효곡동과 북구 우창동까지 총 길이 6.6㎞로 이어져 있다. 포항의 중심인 중앙동에 있던 옛 포항역을 기점으로 북쪽으로 2.3㎞, 남쪽으로 4.3㎞로 뻗은 옛 철도 동해선을 따라 조성됐다. 지난 2005년 열차 운행이 중단된 후 도시 숲으로 재탄생할 때까지 가로등 하나 없는 쓰레기만 나뒹굴던 을씨년스러운 곳이었다. 철길 양 옆으로 도보 20분 거리에는 포항 인구 5분의 2 이상이 거주하고 있지만 대낮에도 인적이 드물었다. 꽃과 나무를 심고 자전거 길과 인공폭포, 음악분수, 산책로, 공원으로 변신을 거듭하면서 포항 인기 지역이 됐다.
많은 산책로 중에 유독 그린웨이로 사람들이 몰려드는 건 도심에선 웬만해선 접하기 어려운 울창한 숲 덕분이다. 포항시는 지난 2009년 북쪽 2.3㎞구간을 조성할 때 2,600그루를 심은 데 이어 2015년 남쪽 4.3㎞구간 정비 때 이보다 60배나 많은 16만4,000그루를 심었다. 자치단체로는 처음으로 국유지인 철도 부지를 무상으로 받게 돼 토지 매입 비용 200억 원을 절감하면서 남은 예산을 몽땅 숲길에 쏟아부은 결과다.
김응수 포항시 그린웨이추진과장은 “2.3㎞ 구간은 부지 매입에 많은 비용이 들어 숲 조성에 빠듯했지만, 국토교통부 등을 설득해 철도 유휴부지 활용지침을 바꾸면서 4년 뒤 추진한 4.3㎞ 구간 땅 매입엔 단 한 푼도 들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후 철길 숲 조성에 뛰어든 다른 지자체들은 포항시 덕분에 예산을 아끼면서 길 단장에 더 신경을 쓸 수 있었다.
포항 그린웨이만의 매력은 숲길이 도심에서 시작해 도심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전체 6.6㎞ 구간이 강과 바다로 이어진다. 남쪽 끝은 포항의 젖줄인 형산강과 연결돼 강변을 따라 만들어진 산책길을 걸을 수 있다. 북쪽의 끝은 포항 대표 관광지인 영일대해수욕장과 맞닿는다. 그 길 끝에선 탁 트인 푸른 바다를 감상할 수 있다.
6.6㎞의 길 중간중간 고구마 줄기처럼 뻗은 등산로도 포항 그린웨이만의 특별한 매력이다. 산 대부분은 어린 아이의 걸음으로 20분이면 정상에 오를 만큼 나지막하다. 언덕처럼 낮지만, 어디에 오르더라도 바다를 품은 포항 모습을 볼 수 있다. 오밀조밀한 시가지를 따라 영일만이 그리는 눈썹 모양의 해안선, 그물을 쳐놓고 풍어를 고대하는 어선까지 육안에 들어온다.
그린웨이가 처음이라면 걷다가 ‘반드시’ 발걸음이 멈추는 곳이 있다. 국내 유일 천연가스 불길을 볼 수 있는 ‘불의 정원’이다. 이곳의 천연가스는 2017년 3월 8일 옛 포항역 남쪽 4.3㎞ 구간에 숲 조성 공사 도중 발견됐다. 조경수에 공급할 지하수를 찾기 위해 굴착하던 중 갑자기 불길이 치솟았다. 당시 장비에 타고 있던 공사업체 인부가 화상을 입고 병원으로 이송됐을 정도다.
하늘로 치솟은 불길에 시민들은 크게 놀랐다. 이 지하에 매설된 가스관이 터진 줄 알았지만, 100% 천연가스가 도심 복판에서 나온다는 사실에서 그랬다. 자연이 만든 불길은 장시간 이어진 소방당국의 진화작업에도 꺼질 줄 몰랐다. 거품 소화액을 퍼붓고 흙으로 덮었지만 허사였다. 비가 오는 날에도 활활 타올랐다.
천연가스 불길로 난감해진 포항시는 공원 설계를 바꾸는 대신 역발상을 했다. 가스전을 그린웨이의 명물로 만들자는 것이었다. 현장을 그대로 두고 방화유리 등 안전시설을 설치해 일대를 ‘불의 정원’으로 꾸몄다. 나아가 불꽃을 이용해 음식물을 조리할 수 있도록 쇠기둥과 지름 40㎝짜리 냄비를 달았다. 여기서 달걀을 삶아 나눠주는 이색 행사도 열었다. 결과는 대성공. 꺼지지 않는 불꽃은 철의 도시 포항을 상징하는 용광로를 떠올리게 할 뿐만 아니라, 불을 구경하러 온 관광객까지 몰리면서 그린웨이를 지역의 새로운 관광명소로 격상시켰다.
4년째 활활 타던 천연가스 불꽃도 최근 자주 꺼지고 있다. 하지만 시는 자동 재점화장치를 달기도 했지만, 해당 가스전 고갈에 따른 다른 활용 방안을 모색 중이다. 박재관 시 홍보담당관은 “정확한 가스 매장량은 파악되지 않지만, 불이 자주 꺼져도 불의 정원을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며 ”족욕탕 등으로 새롭게 바꾸어 명소화하는 방안 등을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곳곳에 산재한 다양한 형태의 조형물도 천연가스 불꽃 못지않은 그린웨이의 색다른 볼거리다. 작품 대부분은 포항을 대표하는 축제 스틸아트페스티벌에 출품됐던 강철 소재 예술품이다. 매년 한 차례 열리는 이 축제는 포스코 포항제철소와 현대제철 등 포항철강산업단지 근로자들이 유명 작가와 협업해 만든 작품이 대거 쏟아진다. 철강 근로자의 땀과 재능기부로 완성된 조형물은 그린웨이의 새로운 자랑거리다.
요즘 그린웨이에 들어서면 주변으로 철거 작업 현장을 쉽게 볼 수 있다. 허물어지는 건물들은 기차가 다니던 시절 ‘기찻길 옆 오막살이’로 불리던 낡은 주택이다. 슬레이트를 이고 있던 집들은 최근 고급 인테리어로 무장한 카페나 식당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그린웨이 주변에 있는 북구 양학동 한 부동산소개소 공인중개사는 “철길을 따라 땅값이 많이 뛰었다”며 “평일에도 유동인구가 많다 보니 길이 없는 맹지까지 꾸준히 오르고 있다”고 말했다.
그린웨이의 높은 인기를 반영하듯 구도심 중심가에 위치한 옛 포항역 일대는 포항에서 가장 높은 69층의 주상복합 아파트가 예고돼 있다. 이곳은 도시 재생으로 출발한 그린웨이 조성 사업 종착지이기도 하다. 주상복합아파트 3개동과 20층 규모의 호텔 1개동이 들어선다. 또 지하에는 공공지하주차장이 들어서고 지상엔 그린웨이와 연계된 공원으로 꾸며진다.
그린웨이가 침체된 포항 구도심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지만, 아직 못다 한 숙제가 있다. 100여 년 전 동해선 포항구간과 포항역사가 들어선 뒤 생긴 집창촌이다. 성매매집결지는 도심 한가운데 위치한 데다 밤에도 대학처럼 불을 밝힌다고 해서 '포항의 중앙대학'이라는 별칭까지 갖고 있다. 여성단체들은 초고층 주상복합 건설이 집창촌 폐쇄와 맞물리길 기대하고 있다.
이강덕 포항시장은 “구도심의 상징인 옛 포항역 개발을 통해 도시 재생으로 출발한 그린웨이를 완성시키고 낙후된 주변 지역까지 환경 개선 사업을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