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표준인 질병… 치료받지 못한 소녀는 자신을 미워했다

입력
2021.09.25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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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 발병 비슷한 ADHD, 여성 진단은 남성의 35% 
성인 되기 전 진단·치료 비율도 남성이 월등히 높아




김희주(25) 웹 개발자,
문조형(가명·24) 인물 사진작가,
박혜원(26) 유튜브 영상 편집자,
연파랑(가명·29) 간호사,
장혜선(31) 출판사 직원,
정지음(29) 작가,
최소희(가명·21) 편입 준비생.

나이도, 하는 일도 다른 7명의 여성. 이들에겐 같은 혼란이 있었고, 같은 아쉬움이 있다. 어린시절부터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를 앓았지만, 이를 포착하고 진단을 받은 건 성인이 되어서라는 점이다.

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남과는 ‘어딘가’ 달라 눈총을 사면서도 병을 앓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선천적·후천적 요인으로 전두엽을 비롯해 뇌의 집중력을 담당하는 부위의 발달이 지연되는 신경 발달 장애 ADHD.

빨리 치료를 받았다면 자신과의 힘든 싸움도 덜했을 텐데, 자신도 주변에서도 장애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왜일까.

ADHD라면 흔히 떠오르는 모습은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물건을 집어던지는 행동이 과하고 충동적인 남자아이다. ADHD의 증상과 개념이 정립되던 시기, 연구자들은 눈에 띄는 과잉행동을 하는 소년을 표준으로 삼았다. 교실 한구석에 조용히 앉아 머릿속으로 딴 생각을 하거나 가만히 있지 못해 손발을 꼼지락거리는 여자아이. 숙제와 준비물을 자주 잊는, 대화 중에 주제를 휙 바꿔버리고 지나치게 자기 이야기만 하는 수다스러운 여자아이 역시 ADHD임에도 주목받지 못했다.


남녀 발병 비율이 비슷할 것으로 추정되지만, 여성 환자는 남성의 35%에 불과한 ADHD. 한국일보는 진단에서 소외돼, 오랜 세월 이유도 모른 채 고통을 받아야 했던 7명의 여성을 만났다. 우리가 놓친, 그리고 놓치고 있을 ADHD를 앓는 여자아이들을 위해서.

'조용한' 소녀들의 ADHD

출판사에서 일하는 혜선씨는 ADHD라는 단어를 들으면 연상되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2018년 정신과 의사로부터 ADHD가 의심된다는 말을 듣고선 성인 집중력 검사를 비롯해 풀배터리 검사(마음 상태에 대한 심리검사), 자기공명영상(MRI) 검사까지 받아봤다는 그는 진단서와 처방전, 영수증 등을 모두 모아둘 정도로 꼼꼼했다.

"학생 때는 조용하단 얘기를 주로 들었어요. 똘똘하다, 영리해 보인다, 차분하다는 평가도 자주 있었고요."
혜선

그러나 남들에게 보이는 모습과 달리 혜선씨는 현실에 집중하지 못하고 공상에 빠지기 일쑤였다. "선생님 말씀에 집중해서 조용한 것이 아니라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많아서 정작 방금 무슨 얘기를 하는지 들었냐고 물으면 대답을 제대로 못 했죠."

사진작가 조형씨는 "수업 시간에는 항상 조용히 딴짓을 하거나 ‘멍’ 때리는 아이였다"라고 소개했다. 소희씨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조용하고 늘 책을 붙들고 있는 아이'로 기억한다. 한번 책을 읽기 시작하면 몇 시간이고 빠져들 정도로 좋아하는 일에는 집중력이 뛰어났지만, 흥미 없는 일엔 영 집중하지 못했다. 머릿속도 여러 생각들로 시끄러웠다. 그는 "선생님이나 친구들은 '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하곤 했다"라고 전했다.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공상가형 여자아이들. 이들은 사실 숨겨진 장애로도 불리는 '조용한 ADHD'를 지니고 있을 수 있다. ADHD는 과잉 행동, 충동성, 주의력 결핍 등이 주 증상이지만, 주의력 결핍만 두드러지는 조용한 ADHD는 알아차리기 어렵다. 미국 조지타운대학교의 소아청소년과 임상 조교수이자 국립 여아·여성 ADHD 센터의 공동 설립자인 패트리샤 퀸 박사는 그의 저서 '주의가 산만한 소녀들'에서 "오랫동안 여자아이의 ADHD는 간과되어 왔다"라고 주장했다. 퀸 박사 역시 대학에 진학하고 나서야 본인과 여동생의 장애를 눈치챘던 산 증인이기도 하다.

'조용한 ADHD'는 가정은 물론 학교에서도 타고난 성격으로 여겨 무시하기 쉽다. 퀸 박사는 "여성 환자는 증상이 어느 수준 이상으로 진행돼 학업이나 사회성 등의 문제가 심각해져야 깨닫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라고 꼬집었다.

증상 숨기려… '완벽주의' 시달리기도

"자주 까먹는 걸 스스로 아니까, 뭐든지 메모장에 적고 계획의 계획의 계획까지 다 짜둬야 마음이 편해요."
소희

'덜렁거리지 말라'는 쓴소리를 하루에 수십 번 듣던 소희씨. 그러다보니 해야 할 일이 생기면 두세 배로 신경을 쓰는 강박에 시달렸다.

파랑씨는 대학 수업에서 졸지 않으려 대부분의 수업을 맨 앞자리에서 듣고, 그것도 모자라 녹음까지 해야만 마음이 놓였다. "실수하지 않으려고 자잘한 일들까지 리스트에 꼭 적어서 확인하곤 한다"는 그는 ADHD라고 주변에 알리자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 돌아올 정도다.

여성들은 자신도 모르게 ADHD 증상을 숨기려 애쓰며, 그래서 더욱 드러나지 않는다. ADHD가 있는 여자아이 4분의 3이 진단받지 못했다는 추정치를 내놓은 미국의 임상심리학자 앨런 리츠먼은 영국 BBC와의 인터뷰에서 "여성에 대한 사회적 기대는 ADHD 증상과는 반대되므로 여성 환자 대부분은 증상을 숨기려고 부단히 노력한다"라고 했다.


이런 사회적 위장능력은 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남성보다 더 많은 비판에 시달리는 탓에 생긴 생존전략이다. '여자는 ○○해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이 그들이 사회적 관계를 그럭저럭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지음씨는 "만약 나이가 같은 남성 ADHD 환자가 있었다면 제가 더 많이 혼났으리라고 본다"라고 말했다. 덤벙거리거나 욕설을 하는 등 사회가 허용하는 여성성에 부합하지 않는 모습을 보일 때 마다 어른들로부터 '시집 어떻게 가려고 하니'라는 핀잔을 들었다는 것. 그는 "ADHD 남성은 '장가 어떻게 가려고 하니'라는 말은 안 들어봤으리라고 확신한다"고 덧붙였다.

임상심리학자이자 ADHD를 앓는 신지수씨는 "모든 여성 환자가 조용한 ADHD 증상을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충동 성향이 있더라도 잘 감추기 때문에 조용하게 발현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인터뷰를 위해 만난 7명 여성 모두가 조용한 ADHD는 아니었다. 과잉 행동이나 충동성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사례도 있었다. 그러나 "어렸을 땐 과격하고 충동적이었지만 부모님이나 어른들에게 '혼나면서' 차차 줄어들었어요."(혜원)

젠더 편견 탓에 늦어진 진단

ADHD 연구자들은 잠재적인 환자의 성비는 엇비슷한 수준이라고 본다. 그러나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2020년 기준 ADHD로 내원한 국내 남성 환자의 수는 5만8,480명이지만 여성은 35%인 2만478명으로 차이가 컸다.

특히 남성은 ADHD 환자의 80%에 달하는 4만7,275명이 성인 이전(0~19세)에 진단을 받은 반면, 여성은 절반을 조금 넘는 1만1,922명(58%)만이 소아·청소년기에 자신의 병을 알 수 있었다.

"정신과 환자들도 가끔 입원하는 병동에서 일했는데도 ADHD는 '말썽꾸러기 남자아이'라는 편견 때문에 제게 나타난 증상이 병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파랑

간호사인 파랑씨조차도 ADHD의 색안경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자신의 병을 서른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파랑씨는 "젠더적 편견 때문에 여성 환자들이 증상을 인식하고도 ADHD보다는 자신의 문제라고 여기면서 고통받는다"면서 "이로 인해 여성의 진단과 치료 역시 늦어지고 있다"라고 안타까워했다.

여성 환자들은 삶 속에서 ADHD와 직접 마주치기도 했지만 자신의 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혜선씨는 대학생 시절, ADHD를 주제로 발표를 했던 경험이 있다. 한 육아 예능 프로그램에 나온 ADHD 남자아이가 소란을 피우는 '전형적인' 모습을 소개하자 강의실이 웃음바다가 됐다. 혜선씨 역시 따라 웃었다. "관련 질환을 조사하는 동안 성인 ADHD 얘기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어요. 남아, 초등학생, 정신 사나움, 시끄러움이 대표 키워드였죠."

그로부터 5년이 지나서야 혜선씨는 장애 진단을 받았다. 우울증으로 찾은 병원에서 'ADHD 증상일 수 있다'라는 말을 들은 것. ADHD로 인한 부주의와 실수는 자존감 저하로 이어졌고, 이로 인한 동반 질환(기분장애, 수면장애 등)에 시달리다가 우연히 장애를 알게 됐다. 그는 "빈혈이라고 하면 가냘픈 여성이 쓰러지는 모습을 떠올리듯 ADHD의 이미지도 굳어져 의심을 못 하게 된다"라고 지적했다.

소희씨도 중학생 때 ADHD라는 질환을 알고 일부 증상에 공감했으나 자신은 아니리라고 여겼다. 소희씨는 "ADHD는 어린 남자애들만 걸리는 줄 알았다"면서 "물건을 부수거나 뛰어다니지도 않고 조용한 난 아니라면서 넘겨버렸다"라고 전했다. '남자아이의 장애'라는 암묵적 합의가 아니었더라면 훨씬 일찍 병을 발견할 수 있었던 셈이다.

환자가 됐다, 그러자 행복해졌다

"ADHD라는 판정을 받은 후엔 정말 기뻤어요. 그동안 제 재능과 욕심만큼 성과를 내는 일이 힘들었는데 해결할 방법이 있다는 거니까요."
희주

‘당신은 병을 앓고 있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놀랍게도 여성 ADHD 환자들의 적지 않은 숫자가 자신의 질환을 알고 나서 위안과 해방감을 느꼈다. 희주씨는 진단 전에는 그저 자신을 '집중력이 약하고 정신적으로 산만한 사람'이라고 여기며 살아왔다.

퀸 박사와 미국의 여론조사업체 해리스 인터랙티브의 설문 조사에서도 ADHD 여아 56%가 'ADHD라는 사실을 알고 기분이 나아졌다'라고 답했다. 퀸 박사는 "그들은 자신이 게으르거나 지능이 낮은 것이 아니라는 점에 안도했다"라고 설명했다.

정확한 진단명을 얻지 못하고 '원래 그런 아이'라고 손가락질을 받던 여성 ADHD 환자들. "물건을 잃어버리는 등의 잦은 실수로 질책을 받고, 그러면서 자존감이 깎여 우울해했다"(혜원) "자신의 문제점이라고 생각, 스스로 깎아내리고 무기력이나 우울을 느꼈었다"(파랑) "사회적 관계가 무너져 우울증이 왔다"(혜선)는 이들은 증상에 이름을 붙이자 비로소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감정 기복이 심해져 찾은 병원에서 ADHD 진단을 받은 혜원씨는 "다른 문제를 통해서라도 알게 됐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라면서 "아니었다면 죽을 때까지 실수하면서 살았을 것"이라고 홀가분한 마음을 드러냈다. 지금은 실수를 하면 친구들에게 먼저 "ADHD라 이래"라면서 웃으며 넘기기도 한다.

이들은 모두 진단 이후 약물치료를 시작했다. ADHD 치료는 약물이 가장 검증된 치료법이다. 다만 완치 목적보다는 신경 전달 물질의 양을 증가시켜, 증상을 개선하는 데 쓰인다. 낯선 이름의 약을 꾸준히 먹어야 한다는 사실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복용 이후 삶은 확실히 달라졌다. 파랑씨는 "시력이 나쁜 사람이 안경을 쓴 것처럼 머릿속 안개가 걷혔다"라고 했다. 집중력과 능률도 올라 "내가 이전엔 굉장히 힘들게 살고 있었구나"라고도 깨달았다.

본인뿐 아니라 주변에서도 이들의 변화를 실감한다. 소희씨는 "지인들로부터 '차분해지고 행동력이 좋아졌다'는 평가를 듣게 됐다"라고 했다. 동반 질환인 우울증도 자연스레 사라졌다. 조형씨는 "충동적인 행동이 줄다보니 사람들과 다투는 일도 적어지고 업무도 원만하게 풀려 우울할 일이 대부분 해결됐다"라고 전했다.

아쉬움은 있다. 무엇보다 '잃어버린 시간'을 되돌아보게 된다. ADHD 증상으로 멀어진 친구나 가족, 또 학업. 적절한 시기에 치료를 받았더라면 달라졌을 상황에 대한 아쉬움이다. 어렸을 때 ADHD를 발견, 치료를 받으면 증상이 아주 심한 경우를 제외하곤 남과 다르지 않은 삶을 살 수 있다.

전 세계적으로 ADHD 유병률은 5% 안팎. 어릴 때 ADHD로 진단받아도 35~65%는 성인 전에 증상이 사라질 수 있다. 그러나 대한소아청소년정신의학회의 2017년 조사 결과 병원 진료를 받은 비율(치료율)은 0.76%에 그쳤다.

무엇보다 자신을 못난 사람이라고 여겨왔던 시간에 후회가 남는다. 혜선씨는 "청소년기에 ADHD를 발견했다고 지금 억대 연봉가가 되진 않았겠지만 적어도 자신을 존중하는 사람이 됐을 것"이라고 했다. 평생을 스스로 부족하다고 생각했기에 지금도 누군가의 칭찬조차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는 당시의 자신, 그리고 같은 환자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네가 나쁜 게 아니야. 그건 그냥 병 때문이었어'라고.

전혼잎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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