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 남천안나들목에서 멀지 않은 세종시 소정면 세종첨단산업단지. 이차전지 4대 핵심 소재 중 하나인 흑연 음극재를 국내에선 유일하게 양산하고 있는 포스코케미칼이 기존 공장 옆에 새 공장을 짓고 있었다. 전기차 배터리 시장이 급속도로 커지면서 음극재 수요도 늘어 계속 증설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SNE리서치에 따르면 지난해 140GWh 안팎이었던 전기차 배터리 시장 규모는 2030년 3,000GWh 수준으로 22배 이상 커질 전망이다. 실제 시장은 매번 이런 예상치도 웃돌 정도로 폭발적인 성장세다.
가로 140m, 세로 60m, 높이 25m의 공장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뜨거운 열기가 확 몰려왔다. 배터리의 양극재에서 나온 리튬 이온을 저장했다 방출하며 전기를 발생시키는 역할을 하는 음극재는 주로 자연광산에서 채취한 흑연을 가마 같은 소성로에 넣고 고온으로 처리해 만든다. 소성로로 들어가는 컨베이어벨트 위엔 미세한 흑연 분말이 담겨져 있었다. 한번 소성이 시작되면 14시간 동안 구워야 해 경쟁력은 얼마나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느냐로 결정된다. 10년 전 국내 음극재 생산이 전무할 때 흑연 음극재 국산화에 성공해 중국산과 일본산을 대체해 온 포스코케미칼은 이후 꾸준한 설비 개선 등을 통해 단위 설비당 생산 능력을 8년 만에 8배로 올리는 쾌거를 이뤘다.
축구장보다 더 넓은 공장 안에선 사람 그림자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공장을 둘러보는 동안 만난 직원 한 명이 엄지를 세우면서 “안전”이라고 인사하자 공장을 안내하던 이원길 음극재생산부장이 똑같이 엄지척을 하며 “제일”이라고 답한 게 전부였다. 원재료인 흑연이 공장으로 입고돼 원료 창고 선반 위에 올려지는 순간부터 표면처리-소성-분급-균질화-탈철-포장 과정까지 전 공정이 자동화로 진행된다. 포스코케미칼은 현재 글로벌 음극재 시장에서 4위(생산능력 기준)지만 2030년엔 정상을 차지하겠다는 목표로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전망은 밝지만 리스크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음극재의 원재료인 흑연은 중국 의존도가 절대적이다. 중국과 협력을 강화하면서도 아프리카와 호주 등의 흑연 광산을 확보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는 한편 천연 음극재를 대체할 기술에 박차를 가하는 이유다. 지난 7월 포항시 동해면에 인조 음극재 공장을 착공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인조 음극재는 천연 흑연이 아니라 제철 공정에서 나오는 석탄 부산물인 콜타르를 가공해서 얻어지는 바늘 모양의 침상 코크스를 원재료로 쓴다. 미국과 일본에 이어 세계 3번째로 국산화에 성공했다.
김도형 포스코케미칼 에너지소재연구소장은 “포스코가 산업의 쌀인 철강으로 경제 발전의 밑바탕이 됐듯 이젠 포스코케미칼이 원재료부터 시작되는 진정한 의미의 이차전지 소재 국산화를 통해 소재보국(素材報國)의 이념을 실현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이러한 문제는 음극재에 그치지 않는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우리나라 이차전지 4대 핵심 소재의 해외 의존도는 양극재 47%, 음극재 80%, 전해질 66%, 분리막 69%(2019년 기준)에 이른다. 지난해 전기차용 배터리 세계 시장 점유율에선 LG에너지솔루션(29%, 1위) 삼성SDI(6.5%, 4위) SK이노베이션(4.2%, 6위) 등 3사가 선전했지만 한 꺼풀 벗겨보면 국산이 아닌 외국산 소재가 많이 쓰이고 있다는 얘기다. 배터리 제품보다 핵심 소재에서 생기는 부가가치가 더 크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속은 중국과 일본의 소재 업체가 챙기고 있는 셈이다.
원재료 문제는 더 심각하다. 현재 전기차용 배터리의 대세는 리튬이온 전지인데, 리튬은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소금호수 등 특정 지역에만 매장돼 있다. 더구나 현재 최대 생산국인 호주산 리튬 중 90%는 중국이 싹쓸이하고 있다. 양극재를 만들 때 꼭 필요한 광물로 수요가 점점 늘고 있는 니켈도 인도네시아와 호주, 브라질이 전 세계 매장량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인도네시아가 지난해 니켈 원광 수출을 금지하자 중국은 곧바로 인도네시아에 막대한 시설 투자를 단행하기 시작했다. 양극재를 만들 때 쓰이는 코발트도 글로벌 매장량의 50%가 콩고에 집중돼 있고, 중국이 광산 채굴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 콩고 코발트 수출량의 84%를 중국이 가져 간다.
우리나라보다 더 급한 건 미국이다. 조 바이든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작성된 ‘반도체 배터리 희소광물 의약품 등 4대 산업 공급망 100일 점검 보고서’는 미국의 위기 의식을 잘 보여준다. 보고서는 중국이 리튬 시장을 장악하고 있고 리튬 가공 시설이 대부분 중국에 위치한 반면 미국엔 리튬 가공 시설이 단 한 곳도 없는 사실을 적시했다. 코발트도 전 세계 정제 시설의 72%가 중국에 있다. 흑연도 연간 글로벌 생산의 68%가 중국에서 이뤄진다. 중국의 배터리 단계별 시장 점유율은 원재료 정제와 가공이 80%, 양극재와 음극재가 66%, 배터리 셀이 73%에 달한다.
보고서는 중국이 과거에도 희토류 수출 금지를 통해 무역 보복을 한 적이 있다며 미중 무역 분쟁 과정에서 배터리 소재가 무기화할 가능성을 우려했다. 신뢰할 만한 동맹 국가들과 파트너십을 강화할 것도 제안했다. 미국 내 배터리 생산 시설 확충을 위해 투자 기업에 대출 프로그램과 세제 혜택을 줘야 한다는 의견도 내 놨다.
이러한 미국의 위기는 한국엔 기회가 될 수 있다. 배터리 산업에 대한 중국의 지배력을 견제하는 게 절박한 미국과, 중국 업체들과 경쟁해야 하는 한국의 이해는 일치한다. 대출 및 세제 혜택을 받고 미국 내 투자를 확대하는 것도 방법이다. 미국은 배터리 공급망 구축을 위한 대대적인 수요 촉진책도 예고했다. 미국의 전기차 시장이 급속도로 커질 수 있다는 얘기다. 최근 외국인이 한국 증시에서 배터리 관련주를 사들이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도 나온다.
현장에선 원재료와 소재의 탈중국을 추진하는 것과 함께 전문인력 양성이 시급하다고 성토했다. 기업들이 필요한 석·박사급 전문 인력은 적어도 연간 2,000명 이상인데 현재 국내에서 배출되는 인력은 200명도 안 되기 때문이다. 국내 대학 중 이차전지학과를 개설한 곳은 아직 한 곳도 없다. 산업분류항목에도 이차전지는 아예 없다.
더구나 중국뿐 아니라 최근에는 미국이나 유럽 기업들도 한국 인력을 영입하는 데 혈안이 돼 있다. 국내에서 받는 연봉의 3배 이상 주고 데려가고 있는 게 현실이다. 첨단 기술과 노하우의 유출 등도 우려된다.
정부도 석·박사 핵심인력 양성을 50명에서 150명으로 늘리고 유관 학과에 이차전지 트랙을 구축하는 등의 방법으로 연간 1,100명 이상의 인력을 양성하겠다는 계획을 내놨지만 업계에선 턱없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김 소장은 “배터리 관련 기업들은 지금 인력을 대거 뽑고 싶어도 사람이 없어 뽑지 못한다”며 “반도체 산업을 일으킬 때 대학에 관련 학과를 세워 전문 인력을 육성한 것처럼 K-배터리 산업을 발전시키려면 무엇보다 해외 자원 확보와 함께 인력 양성에 국가적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