깃발이 다가왔다. "문재인 때문에 나라가 망하면 살아남을 거 같아? 정신 차려"라는 저주와 함께. 엄마는 어린 딸의 귀를 서둘러 막았고, 또래의 노인은 혀를 끌끌 찼다. 멋쩍어진 그는 같은 깃발의 무리를 찾아가 다시 씩씩댔다. 광화문에서 마주한 분노는 독했지만 공허했다.
성난 '좌표'는 인터넷 커뮤니티에도 넘실댔다. "쇼트커트라서", "여대니까", "남혐 용어를 썼다"는 터무니없는 이유로 국가대표 선수를 향한 성차별 공격과 혐오가 판을 쳤다. 다행히 억지는 상식 앞에 금세 꼬리를 내렸지만, 분노는 허술했고 시시했다.
아스팔트와 키보드를 점령한 분노가 증폭되는 원리는 유사하다. 일단 우리에게 맞설 그들, 적을 만든다. 그리고 스스로도 어찌하지 못해 품고 있는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문제를 오로지 적의 탓으로만 귀속시킨다. 대통령만 바꾸면, 여자들만 공격하면 이 세상 모든 골칫거리들이 한순간에 사라질 것처럼.
공론장에서 원인과 대책을 찾는 대신 개인과 특정 집단에 분노를 쏟아내며 돌파구를 찾으려는 "구조적 문제의 의인화"(김내훈의 '프로보커터')가 한국 사회를 뒤덮은 모양새다. 선봉에 서 있는 건 상대를 향한 극단적 도발로 이익을 챙기는 '도발자들', 프로보커터(provocateur)다. 도발의 공식은 단순하다. 팩트와 논리는 사치, 선동과 호통은 필수다.
따지고 보면 프로보커터의 '원조'는 여의도다. 상대를 향한 도발로 네 편을 자극하며, 내 편을 박박 그러모으는 데 정치인만큼 특화된 부류도 없다. 대한민국 미래를 두고 겨뤄야 할 대선에서도 여야가 몰두하는 건, 비전 경쟁 대신 분노 쌓기다. "000은 안 된다"며 상대를 향해 화만 내고 싸울 뿐, "내가 어떤 정치를 하겠다"는 주어는 실종됐다.
여의도 새내기 야권 주자들은 '반문'의 깃발만 치켜들었다. 정치적 중립성까지 훼손하며 대권 도전에 나선 전직 검찰총장, 전직 감사원장이 지금껏 내세운 비전은 '문재인 없는 나라'다. 공약도, 국정철학도 문재인 정부에 대한 안티 테제로 급조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분노를 드러낼수록 도드라지는 건 능력과 자질의 빈곤이다. 갈 길 바쁜 와중에 터진 대형 지뢰가 야속할 수는 있으나 "제가 그렇게 무섭냐"(윤석열)라는 역정만으로, 지나친 겸손함은 무책임의 동의어임을 새삼 일깨워준 "아직 준비가 안 됐다"(최재형)는 변명만으로 대통령 자리를 넘볼 수는 없지 않은가.
여권도 나은 건 없다. 권력에 취했는지, 싸움에 취했는지 경선 레이스 내내 서로를 향한 도발로 날을 지새우니 뇌리에 남은 건, 적자니 서자니 핏줄 타령과 지역주의 망령, 그리고 네거티브는 이제 중단하겠다는 찰나의 다짐뿐. 이재명의 비전인 '기본 시리즈'는 정말 기본만 알겠고, 이낙연의 신복지·신경제는 정작 무엇이 새롭다는 것인지 모른 채로 끝날 판이다.
분노와 싸움에만 기댄 '프로보커터 정치'는 쉽다. 당장의 환호와 응원이 너무 달콤해 기운이 뻗칠지 모른다. 쉬운 정치는 나쁜 정치다. 국민의 분노를 해소해주긴커녕 땔감으로 삼아선 곤란하다. 여기, 네 편 내 편 치고받는 깃발 주변을 피해 서성이는 이들이 있다. '프로보커터 정치'에 질려 차곡차곡 쌓여가는 진짜 분노, 이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이 정녕 들리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