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유명 대학병원에서 펠로우(전임의)로 근무하던 A(39)씨는 지난해 지방의 한 국립대 의대로부터 교수 자리를 제안받았다. 대기업 대졸 초임 수준의 월급, 팍팍한 서울 생활에 가장으로서 체면이 서지 않아 여기저기 알아보던 중 한 군데서 제안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조건을 놓고 대학 측과 이야기를 하던 중 A씨는 중도에 포기했다. ‘서울에서 살아야 한다’는 아내의 완강한 반대가 있었다. 적게 벌어도 서울에서 사는 게 ‘국립대 교수’ 타이틀보다는 훨씬 낫다는 아내의 주장을 꺾을 방법이 없었다. ‘가려면 이혼 도장 찍고 가라’는 말까지 나온 터였다. 영남권의 한 대형병원 관계자는 “서울 지역 의사들을 스카우트하는 과정에서 연봉 협상까지 마쳤더라도 그게 언제 뒤집힐지 모른다”며 “‘가족 반대’를 이유로 서울 사람들의 지방행이 무산되는 일이 허다하다”고 했다.
‘수도권 블랙홀’로 압축되는,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집중 현상이 정부의 지역균형발전, 지방분권 정책에도 완화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9일 울산시에 따르면 울산우정혁신도시 주민등록 인구는 작년 말 기준 1만9,988명을 기록했다. 2017년 2만1,166명으로 정점을 찍은 뒤 2만 명 밑으로 주저앉았다. 한국석유공사, 한국산업인력공단 등 9개 공공기관이 입주한 이들 기관 직원 중 가족과 정착한 비율은 6월 2,817명으로, 전체 45% 수준이다. 수도권에 집중됐던 공공기관을 각 지역에 재배치해 조성한 혁신도시가 당초 취지와 달리 겉돌고 있다.
경북 김천 경북혁신도시에도 금요일 오후면 진풍경이 펼쳐진다. 혁신도시 내 공공기관에 근무하는 1,000명 내외의 직원들이 수십 대의 셔틀버스에 나눠 타고 서울로 간다. 한 관계자는 “KTX로 귀경하는 인원을 더하면 12개 이전 기관 임직원 중 절반 이상이 ‘기러기’일 것”이라며 “이게 여기서만 볼 수 있는 유별난 장면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실제 지난 6월 기준 전국의 혁신도시 가족 동반 이주율은 절반 수준(53.7%)에 그친다. 또 지지부진한 혁신도시 완성을 위해선 수도권 공공기관의 2차 이전도 속도감 있게 추진해야 하지만 감감무소식이다. 김사열 대통령직속 국가균형발전위원장은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제2차 공공기관 지방 이전은 반드시 해야 하는 과제”라면서도 구체적 일정을 밝히지는 못했다.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사람들이 지방의 신도시로도 옮겨가지 않은 상황에서 쇠락한 고향과 그 인근 도시로의 인구 유입을 기대하는 것은 기대 난망이다. 전남 진도가 고향인 B(58)씨는 최근 30억 원이 넘는 서울 강남의 아파트와 사업체를 정리한 뒤 광주로 내려갈 계획을 세웠다가 접었다. 그 돈이면 넓고 고급스러운 아파트에 카페나 식당 같은 작은 가게를 하나 열고 나머지 돈은 은행에 예치해 여생을 고향 가까이서 살고 싶었다. 그는 “아내는 응했지만, 자식들이 문제였다”며 “자기들은 서울에 고시원만 하나 잡아줘도 되니, 내버려 주고 엄마, 아빠만 내려가라고 하는데, 방법이 없었다”고 말했다.
지역이, 고향이 외면받는 배경으로 여러 가지가 거론되지만 열악한 교육, 문화 환경과 함께 신뢰하기 힘든 수준의 의료서비스가 꼽힌다. 이 같은 현실은 섬을 제외한 국내 지자체 중 면적과 인구가 최하인 경북 영양에서 여실히 확인된다. 조지훈 오일도 이문열 등을 배출한 문향(文鄕) 영양군은 8월 말 기준 주민등록 인구가 1만6,350명이다. 한때 7만 명 이상이 모여 살던 곳이지만 젊은 사람들이 도시로, 수도권으로 빠져나가면서 쇠락했다.
7일 찾은 영양읍내에선 기본적으로 사람을 구경하기 힘들었다. 군 인구 43%가 모인 읍내라지만 이따금 보이는 이들은 대부분 70, 80대 노인이었다. 그 흔한 신호등도 드물었고, 편도 2차선 이상의 도로는 볼 수 없다. 1㎞가량의 읍내 중앙로엔 ‘이용소’만 4곳, 미용실은 그 절반도 되지 않았다. 민간 의료기관은 병원급 하나, 일반의원 하나, 한의원이 둘이지만 치과는 3곳이다. 초등 2학년 등 두 딸을 키운다는 정모(40)씨는 “발레 같은 전문적인 학원이 없어 안동까지 가야 하는 게 불편하지만, 무엇보다 큰 문제는 병원”이라며 “3년 전쯤 맹장염에 걸린 아이를 단순 장염으로 오진, 큰일 날 뻔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직장 때문에 발붙이고 살고 있지만, 의료 문제를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도시로 뜨고 싶다는 것이다.
의료 격차는 지방 중소도시나 농어촌이 겪는 최대 난제다. 아이를 낳지 않는다고 전국이 아우성치지만, 농어촌에선 아이를 가져도 걱정이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산부인과가 없는 시·군이 전국 22곳이다. 있더라도 분만실이 없는 지역이 42곳에 달했다. 정부는 2006년부터 14년간 저출산을 극복하기 위해 380조 원을 투입했으나 인구는 크게 늘지 않았다. 일부 자치단체가 도입한 출산장려금을 비롯한 지원시책으로 단기간 신생아가 늘어나는 효과를 봤지만, 아이들이 성장하면 '인 서울' 대열에 합류하는 경우가 많았다. '원정출산 인센티브'에 불과한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는 이유다.
경북 의성에 사는 임미애(55) 경북도의원도 “교육이나 문화는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의료는 목숨이 걸린 문제”라며 “수도권 대형병원 유명 교수들이 정년퇴직 후 고향으로 내려와 봉사할 수 있는 여건 마련 등 지역의 의료 서비스 수준 개선 없이는 소멸 위기로 치닫고 있는 지역에서 인구 유입, 출산율 상승을 통해 활기를 불어넣긴 힘들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