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2021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에 따르면, 2019년 발생한 데이트폭력은 9,858건이다. 데이트폭력은 아내 폭력의 결혼 전 버전이니 가정폭력 통계도 보자. 2019년 가정폭력으로 검거된 인원 수는 5만9,472명이다.
8월에만 남편이나 전남편이 아내를 살해한 사건은 10건이나 보도되었지만, 사실 아내 살해는 통계에 잡히지도 않는다. 대표적 범죄 통계인 '경찰 범죄 통계'와 '대검찰청 범죄 분석'은 범죄자와 피해자의 관계를 15종(국가공무원, 고용자, 피고용자, 직장동료, 친구, 애인, 동거친족, 기타친족, 거래 상대방, 이웃, 지인, 타인, 기타 미상)으로 분류하는데, 배우자는 없다. 알려진 것보다 현실은 더 끔찍할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왜 이런 일이 생기고 있을까? 어떤 성별이든 어떤 관계에 있든 사람을 때리고 죽여서는 안 된다. 길고양이에게도 안 된다. 모든 생명체에 폭력을 써서는 안 된다. 다들 알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나 많은 여성들이 남자친구나 남편 등 친밀한 관계에 있는 남성들에게 맞고 살해당하고 있다.
넷플릭스 드라마 'D.P.'에 묘사된 폭력에 분개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 나라에서, 심지어 사람 아닌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는 시에 감동받은 사람들도 많은 이 나라에서 말이다. 도대체 왜 이럴까?
일단 관련 법이 미비하고, 피해자 보호와 가해자 처벌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는 점을 꼽을 수 있겠다. 거기에 더해 나는 생각한다. 우리 사회가 남성이 여성에게 폭력을 쓰는 것을 관대하게 봐 주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라고. 소설, 드라마, 영화, 만화 등등을 살펴보자. 남성의 폭력을 좀 거친 애정 표현이라고 여기게 만드는 내용이 너무도 많다.
현진건의 단편 소설 '운수 좋은 날'이 생각난다. 비 오는 어느 날, 동소문 밖에 사는 인력거꾼 김 첨지는 오랜만에 큰돈을 번다. 얼른 집에 가서 아픈 아내를 병원에 데리고 가기는커녕 선술집에 가서 혼자 실컷 먹고 마신다. 취해서 설렁탕을 사 들고 귀가했는데 반겨 맞아주지 않고 누워 있다고 아내를 때린다. 아무 반응이 없자 그제서야 김첨지는 아내가 죽은 것을 알고 "설렁탕을 사다 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왜 먹지를 못하니….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이라며 운다.
이 소설을 배우면서, 이상했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이 아닌데도, 왜 남편인 김첨지의 입장에서 소설을 배워야 할까? 굶고 병들고 매맞다 죽은 아내의 입장이 아니라? 아내가 죽었을까 봐 무서워 집에 못 들어가는 김첨지의 심정을 왜 이해하고 동정해야 하나?
평소에도 돈 못 벌면 아내를 때려서 스트레스를 풀던 김첨지였다. 오랜만에 큰돈을 벌었으면 당장 음식과 약을 사서 집에 달려가야 할 것이 아닌가? 집에 굶주린 아기까지 있는데도. 그런데 김첨지는 돈을 벌자 우선 자기 배부터 채운다. 실컷 먹고 나서야 설렁탕 한 그릇 사들고 집에 간다.
이 대목에서 국어 시험에 잘 나오던 주관식 문제가 있었다. '김첨지가 아내를 때리지만 사실은 아내를 깊이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어를 찾아 쓰라'였다. 답은 설렁탕. 어이없다. 설렁탕 한 그릇 사주면 평소에 때려도 되나? 폭력과 학대, 방치는 사랑이 아니다. 끔찍하다. 김첨지는 아내가 죽은 그날만이 운수 나쁜 날이었을지 몰라도 김첨지의 아내에게는 병에 걸렸는데도 굶은 채로 매맞는 매일매일이 다 운수 나쁜 날이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김첨지의 입장에만 감정이입해 죽은 아내보다 김첨지를 더 불쌍히 여기도록 배웠다. 무섭다. 왜 우리는 인간존중보다 제목인 '운수 좋은 날'의 반어법을 중요하게 배우고 김첨지가 알고 보면 츤데레 스타일(상대방에게 애정이 있지만, 겉으로는 쌀쌀맞게 행동하는 성격 유형을 이르는 말)이라고 좋게 봐 주어야 했을까?
어린이집 다니던 때부터 여자애들은 남자애들이 때리고 괴롭혀서 화를 내면 주위 어른들에게 이런 말을 듣곤 한다. "저 남자애가 너를 좋아해서 그런 것이니 너가 참아." "너가 예뻐서 그래." 이런 환경에서 자라면 여성들은 피해자가, 남성들은 가해자가 되기 쉽다.
2015년에 김수찬이 그린 '상남자'라는 만화를 보자. 남자가 여자를 때리는 것은 상남자의 애정 표현이다. 2018년에 제작된 드라마 '나의 아저씨'도 보자. 주인공 여성(아이유 분)은 맞으면서도 남성에게 "너, 나 좋아하냐?"라고 묻고, 때려 달라는 말까지 한다. 아무리 만화와 드라마상의 표현이라도 모든 허구의 창작물은 현실을 반영하고, 그 창작물은 다시 현실에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다. 그나마 요즘은 페미니스트들의 항의 덕분에 좀 나아졌지만.
사람들은 왜 남자들의 폭력을 '그는 나쁜 남자가 아니야. 사랑하는데 표현만 거칠뿐이야'라고 착각하도록 일상에서 세뇌당할까? 여성이 학대와 폭력을 당하면서도 사랑으로 받아들이게 하고,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한 남성이 관대히 여겨지는 이런 그릇된 문화가 퍼져 있으면 누가 이익을 볼까? 일부 폭력적인 남자들? 그렇지 않다. 남자들 중에서도 상위 계급, 기득권 세력의 남성들에게 이익이 돌아간다.
'운수 좋은 날'로 돌아가자. 만약, 김첨지의 아내가 경찰서에 가서 폭력 남편을 신고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일본인 순사는 아마 접수도 안 하고 돌려보냈을 것이다. 당시 1920년대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내 구타는 흔한 일이었고, 순사도 남성 입장이니 별일 아니라고 여겼을 것이다. 게다가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다. 조센징들끼리 때리든 죽이든 일본 순사는 관심 없다. 일제 침략자들 입장에서는 조선 남자가 조선 여자를 때리는 것은 바람직하다. 죽창 들고 일제에 저항하는 것보다 훨씬 편하기 때문이다.
이런 글을 쓰면 "왜 남녀 성별 갈등을 조장하냐?" "남녀 편 갈라 싸우게 되면 기득권자들만 이롭게 된다"라는 말을 하는 분들이 많다. 전혀 그렇지 않다. 왜 정부가 앞장서서 강남역 살인사건 등 여성 피해자를 노린 범죄가 여성 혐오 범죄가 아니라고 해명해줄까? 왜 비혼 결심한 여성들을 문제가 있다고 후려쳐서까지 결혼시키려는 정책을 세울까? 왜 데이트폭력, 아내 폭력 등 친밀한 관계에 있는 남성의 폭력을 엄중히 다루지 않을까? 그것은 가부장제 국가의 물질적 기반은 여성의 노동력에 대한 남성의 지배에 있기 때문이다.
가부장제 자본주의 국가가 규정하는 젠더 분업은 여성은 집에서 출산, 육아, 가사, 돌봄 노동을 하고 남성은 집 밖에서 임금 노동을 하는 것이다. 반대가 되지 않는 이유는 여성만이 아기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이 집안에서 일생 동안 하는 모든 재생산 노동은 무상 노동이 된다. 이런 맥락에서 가정 밖에서 식당일이나 청소일, 돌봄 노동 등을 하는 여성들은 낮은 대우를 받고 저임금을 받게 된다.
전통적으로 여성이 가정에서 '놀면서 하는' 일이라 여겨지는 하찮은 일을 한다는 이유에서다. 여성들이 무임으로, 저임으로 노동을 해서 발생하는 이익은 가부장 남성, 자본가, 국가가 챙긴다. 그러기 위하여 여성의 독립을 막고 여성에 대한 지배를 유지하기 위한 제도적·문화적 장치들이 사회에 깔려 있다.
그래서 사회는 남성이 여성을 폭력적으로 대하는 것을 용인해 준다. 너를 사랑해서 때리는 거니까 참으라고 여성에게 어려서부터 직접 혹은 소설이나 드라마를 통해 간접 세뇌교육을 한다. 여성이 남성의 지배 밖, 가정 밖으로 도망가지 못하게 막는 한편, 일터나 사회에서 생긴 스트레스를 남성들이 각 가정이나 사적 관계에서 여성을 지배해서 풀 수 있게 해 주려는 의도다.
남성에게 밥과 섹스, 자손 생산, 돌봄 노동, 감정 노동, 노부모 봉양에다가 돈까지 벌어다 주는 노예를 국가가 하나씩 배급해 주어야 하므로 결혼을 장려한다. 그래야 남성들이 말하는 샌드백을 두들겨서 스트레스를 풀고, 사회의 근본적 문제를 만들고 있는 기득권 세력에게는 죽창 들고 반항하지 않을 테니까. 가부장 아래 가족을 조직하면 국가가 각 가정을 관리하기 쉬우니까.
바로 이 점이 우리 사회가 데이트폭력 아내 폭력 등 친밀한 관계에 있는 여성에 대한 폭력에 관대하며 가해 남성을 엄벌하지 않는 근본 이유이자, 남성 폭력에 관대한 사회 문화를 바꾸지 않는 이유라고 나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