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정장 깔맞춤 中 ‘선배 언니’들이 기숙사에 들이닥쳤다

입력
2021.09.12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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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대학, 학생회 선배들 찾아와 후배 잡도리
"우리 외에 누구도 너희들 단속할 수 없어" 
"조폭 영화인 줄...털끝 권력으로 허세" 비난
전국학련 "학생회는 학우 섬겨야" 자아비판

중국의 대학 여학생 기숙사. 검은 정장을 맞춰 입은 선배 언니들이 차례로 들어오자 양편 침대 앞에 줄지어 서 있던 신입생들이 “선배님 안녕하세요”라고 일사불란하게 외친다. 행동대장 격인 여성이 “앞으로 우리 여섯 명의 얼굴을 똑똑히 보게 될 것”이라며 “우리가 다녀가고 나서야 잠자리에 들 수 있다”고 잡도리를 시작한다. 심지어 “우리 외에는 누구도 너희들을 단속할 수 없다”고 다그친다. 마치 군대에서 훈련병들의 점호시간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다.

‘검은 정장 6명’은 학생회 간부들이었다. 무리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덩치 큰 여성이 앞으로 나서자 옆에서 “생활부장”이라며 깍듯이 이름과 직책을 소개한다. 그리고는 책상 밑과 창문, 침대 위 등 곳곳을 가리키면서 청소 상태를 점검한다. 이들은 한바탕 군기를 잡은 뒤 나가면서도 “학생 침실은 표준화가 돼 있다”며 “반드시 최고의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고 훈계를 잊지 않았다.

지난달 31일 이 같은 내용이 담긴 1분 39초 분량의 동영상이 인터넷에 공개되자 중국 여론이 들썩였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웨이보 조회 수는 사흘 만에 3억 건을 넘었다. 분위기가 너무 살벌해 “조폭 영화의 한 장면 아니냐”는 지적이 빗발쳤다. 알고 보니 작년 10월 중국 헤이룽장 직업학원(전문대학의 일종)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학교 측은 다음 날 바로 입장문을 냈다. “확인 결과 동영상 내용이 사실로 드러났다”며 “즉각 진상조사에 착수해 규정에 따라 처리하고 담당 교사를 면직 처리했다”고 밝혔다. 지난 4월 대학 위챗 계정에 “학생회 가입은 마치 작은 새가 하늘을 날듯이 스스로 단련하고 일과 사람을 배우며 성장해 갈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글이 올라와 학생들에게 상당히 우호적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뒤늦게 실상이 까발려진 셈이다.

그런데 정작 전면에 나서 사태를 수습한 건 대학이 아닌 ‘중화전국학생연합회(학련)’였다. 학련은 2일 장문의 사과문을 내고 “개학 시즌을 맞아 일부 학교 학생회 선배들이 신입생을 맞이하는 상견례에서 학우들을 섬기지 않는 불량한 언행을 보였다”며 반성의 뜻을 표했다. 이어 “학생회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남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면서 “조력자로서 봉사할 뿐 벼슬이나 후광이나 위세를 얻기 위한 자리가 아니다”라고 거침없이 자아비판을 했다.

이번 사태가 엄중하다고 판단한 학련은 중국 공산당의 청년조직인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도 거론했다. “공청단에게 학생회를 맡긴 것은 당의 묵직한 당부”라며 “학생회를 잘 지도하는 것이야말로 공청단 본연의 임무이자 정치적 책임”이라고 강조했다. 올해 7월 중국 공산당 창당 100주년을 거치며 당원의 솔선수범을 강조해온 사회적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학련은 중국 공산당보다 역사가 길다. 1919년 일제에 맞선 5·4운동을 계기로 중국 전역에서 학생조직이 움트면서 상하이에 모인 대표 60여 명은 같은 해 6~8월 제1차 전국학생대표대회를 열고 학련을 결성했다. 마오쩌둥을 비롯한 13명이 1921년 7월 23일 제1차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대회를 개최한 것보다 2년 앞섰다. 중고등학교와 대학 학생회 대표들이 참가하는 전국 학련대회는 5년마다 열리는데 지난해 27차 대회를 치렀다.

당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축하서한을 통해 “중국 청년들은 꿈과 신념을 굳게 다지고 고상한 품격을 양성하며 튼튼한 실력을 닦고 과감하게 혁신·창조하는 뜻을 세워 억만 인민들과 함께 신시대 청춘의 노래를 써 내려가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런 기대와 달리 일선 학교에서는 선후배 간 위계를 앞세우는 우악스런 구태와 악습이 여전히 횡행했던 것이다.

학련은 2019년 10월 공청단 중앙, 교육부와 함께 합동으로 전국 3,127개 학교 학생회 실태 점검에 나섰다. 이후 개혁에 앞장서며 젊은 세대의 귀속감을 높이고 사회에도 기여한다는 자부심이 컸다. 하지만 이번 사건으로 그간의 노력이 얼마나 허술했는지 단적으로 드러났다.

문제의 동영상에서 두목인 양 등장한 장(張)모씨에게 비난이 집중됐다. 신상 털기와 함께 “보잘 것 없는 한 터럭의 권력으로 허세를 부리는 것”이라는 조롱이 쏟아졌다. “학생회가 진정 학생을 위한 조직인지 깊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며 성찰을 촉구하는 목소리도 잇따랐다. 일부 선배들의 일탈이 100년 넘게 중국 사회를 지탱해온 학련의 명성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베이징= 김광수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