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어 칸(Noor Inayat Khan, 1914.1.1~ 1944.9.13)은 2차대전 영국 특수작전국(SOE) 정보요원으로 나치 치하의 프랑스 파리에서 스파이로 활약한 최초의 여성이다. 그는 한 레지스탕스의 배신으로 체포돼 약 1년간 게슈타포의 고문을 겪었지만 끝내 기밀을 누설하지 않았고, 2차례 탈옥 시도 끝에 다하우 집중수용소에서 처형됐다. 1946년 영국 정부는 그에게 민간인 최고훈장인 조지십자장을, 프랑스 정부는 무공십자훈장(Croix de Guerre)을 추서했다. 하지만 수많은 전쟁 영웅들-대부분 영국인-의 무용담 속에 인도계인 그의 존재는 이내 잊혔다가 2006년 한 논픽션 작가가 'Spy Princess'란 제목으로 누어 전기를 출간하면서 재조명됐다.
수피사상가 겸 음악가 집안의 장녀로 제국 시절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그는 영국서 간호학교를 다녔고, 프랑스 소르본에서 아동심리학을, 파리 콘서바토리에서 기악과 작곡을 전공했다. 글쓰기에도 능해 20대 중반부터 여러 편의 동화를 출간했고, 잡지와 라디오 등에 작품을 기고하기도 했다. 그의 일가가 1920년 영국서 프랑스로 이주한 까닭은, 가족 중에 거물급 반영 인도독립운동가가 있어 당국의 감시가 집요해서였다. 하지만 2차대전이 터지고 프랑스가 점령당하자 가족은 다시 영국으로 건너갔고, 누어는 곧장 공군 여성보충대에 자원 입대해 무전병으로 일했다. 평화주의자였던 그는 인도 독립과 자유처럼 파시즘에 대한 저항을 외면하지 않았다.
탁월한 무선통신 기술과 유창한 불어 능력을 갖춘 그는 SOE에 발탁돼 고된 첩보원교육을 이수한 뒤 1943년 6월 프랑스로 밀입국, 현지 레지스탕스와 영국의 지원시스템을 연계하는 요원으로 활약했다. 침투 직후 현지 통신요원 대부분이 체포돼 그는 사실상 혼자 약 4개월 동안 네트워크를 운영했다.
2012년 영국 정부는 런던 중심가에 그의 흉상을 세웠고, 2020년 그가 살던 런던 블룸즈베리 인근에 청동 명패를 설치했다. 그를 비롯한 세 명의 2차대전 여성 첩보원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A Call To Spy'가 최근 개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