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역사'를 소비하는 방식

입력
2021.09.08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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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항일무장투쟁의 숨은 주역 안무


간도 국민회군사령관 안무(安武, 음1883.6.29~양1924.9.8)는 일제 강점기의 도드라진 무장 독립운동 지도자지만, 봉오동의 홍범도(1868~1943)와 청산리의 김좌진(1898~1930)의 명성에 가려 덜 주목받은 인물이다.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 당시 그는 독립군 연합부대인 대한북로독군부(사령관 최진동)의 2인자이자 부관으로 참전했다. 연대장이 홍범도였다. 그해 10월 청산리 전투의 승리도 김좌진 부대뿐 아니라 홍범도와 안무 등이 이끈 간도 일대의 거의 모든 독립군 부대가 함께 이룬 대첩이었다.

홍범도는 간도-자유시 참변 후 연해주에 머물다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으로 카자흐스탄으로 이주, 집단농장과 고려극장 관리인 등으로 여생을 보내다 만 76세로 타계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최근 성대한 퍼포먼스를 펼치며 그의 유해를 봉환해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했다. 김좌진은 민족·공산 계열의 불화 속에 고려공산청년회 회원에 의해 암살됐고, 3년 뒤 가족이 유해를 모셔와 고향 홍성에 안장됐다.

함경북도 경성 출신인 안무는 1899년 대한제국 군인으로 입대해 육군 군사훈련담당관으로 근무하다 1907년 군대가 해산되자 교원양성학교를 거쳐 체육교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10년 병탄 직후 간도로 이주, 대한국민회에 가입해 국민회군(대한국민군) 사령관으로서 지역 치안과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그는 홍범도 부대와 연합해 봉오동 전투를 치렀고, 청산리에서도 김좌진과 함께 활약했다.

자유시 참변 직후, 그는 홍범도·김좌진과 달리 다시 간도로 잠입, 독립군 재건을 도모하다 일본군에게 발각돼 저항 끝에 부상당해 체포됐고, 일제에 의한 부상 치료마저 거부하다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김좌진에게 대한민국장을, 63년 홍범도에게 대통령장을 추서했고, 안무에게는 1980년에야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추서했다. 그의 유해는 지금도 지린성 옌볜 룽징에 묻혀 있다.

최윤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