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일제강점기 일본의 군인, 군속으로 전쟁에 참여한 뒤 BC급 전범 처벌을 받은 이들의 피해 문제 해결에 나서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며 마지막 전범 생존자였던 고 이학래씨 등이 낸 헌법소원이 31일 각하됐다. 헌법재판소는 "안타까운 역사"이지만 국제법 효력을 가진 전범재판소 판결에 따른 피해를 위안부처럼 반인도적 불법 행위로 인한 배상청구권과 같은 범주로 보기 어렵다고 이유를 밝혔다. 헌재는 2011년 비슷한 취지로 위안부 피해자들이 낸 헌법소원은 위헌 결정했다.
헌재 판단대로 한국인 BC급 전범 문제는 전쟁 피해로 자리매김되는 위안부나 강제징용 문제와 결이 다르다. 대부분 전쟁 중 동남아 각지의 수용소에서 연합군 포로 관리를 맡다가 전후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이들은 자의든 아니든 가해자 편이었다. 다만 일제 말기 전시동원령 체제에서 반강제로 끌려가 참전한 경위까지 따져본다면 이들 역시 포괄적으로는 일본 제국주의 체제의 희생자다.
분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전후 일본 정부의 이중적인 태도다. 비슷한 처지의 자국민은 보상하면서도 한국인은 일본 국적이 아니라며 대상에서 제외했다. 이들은 전쟁의 최전선에 섰다는 자격지심으로 귀국도 포기하고 일본에서 어렵사리 생계를 이어오다 1991년 일본 정부를 상대로 보상 요구 소송을 냈지만 결국 패소했다. 이후 일부 정치인의 공감을 얻어 일본 내에서 보상 입법 움직임이 일었으나 아직까지 법 제정에 이르지 못했다.
한국인 BC급 전범 문제는 전쟁 동원 책임을 진 일본이 나서서 해결할 문제다. 그렇다고 2006년 이들을 강제동원 피해자로 공식 인정한 우리 정부가 손놓고 있을 일도 아니다. 비록 각하 결정이 났지만 이날 재판관 9명 중 4명이 위헌이라며 원고의 손을 들어준 의미는 가볍지 않다. 한일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됐다는 일본 정부를 상대로, 입법 주체인 일본 국회를 상대로 정부와 국회가 이 문제 해결을 위해 더 적극적인 외교적 노력을 기울여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