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철수를 닷새 앞두고 26일(현지시간) 발생한 카불 공항 연쇄 폭탄 테러 배후로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조직 이슬람국가(IS)가 지목되면서 아프간이 테러 조직들의 각축장이 될 것이란 우려가 현실로 다가왔다. 미군의 공백을 놓고 무장조직 간 난타전이 이제 시작됐다는 얘기다. IS 측은 탈레반을 미국과 협력하는 '배신자'로 여기고 있다.
이날 미 국방부는 이번 테러가 IS의 아프간 지부인 호라산(IS-K)의 소행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밝혔다. IS도 아랍 언론 아마트 뉴스통신을 통해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IS는 ‘아랍의 봄’ 여파로 혼란했던 중동에서 이슬람 국가 건설을 목표로 2013년 시리아와 이라크 일대에서 창설된 무장 조직이다. 혼돈의 틈을 타 세력을 키우다가 9ㆍ11테러 이후 미군과 국제동맹군의 개입으로 세력이 약화됐다. 이중 일부가 2015년 1월 아프간에 진출해 탈레반에서 이탈한 수니파들과 합류하면서 IS-K를 만들었다. 지부명 호라산(Khorasan)은 이란, 아프간, 파키스탄 일대를 말하는 지명이다. 규모는 약 2,000명으로 추정된다.
이슬람 수니파 극단주의 세력인 IS-K와 탈레반은 이념적으로는 비슷하지만 목표와 방법에서 차이가 크다. 탈레반은 아프간에 이슬람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목표인 반면 IS는 중앙아시아 등 국제사회를 무대로 이슬람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탈레반이 서방 국가 대상 테러에 반대하는 반면 IS-K는 서방 국가와 국제 조직 등을 대상으로 서슴없이 테러를 감행한다.
양측은 갈등을 빚어 왔다. 탈레반이 미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하자 IS-K는 ‘배교자’라고 비난했고, 탈레반이 카불을 장악하자 “미국과의 거래로 지하드 무장세력을 배신했다”고 경고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탈레반이 카불 장악 후 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IS 핵심 지도자인 아부 오마르 코라사니와 그의 조직원을 살해했다고 보도했다. WSJ는 “IS가 아프간에 거점을 마련하고, 이탈한 탈레반을 끌어모으면서 탈레반과 충돌을 빚었다”고 전했다.
미군의 개입으로 세력이 줄어들긴 했지만 또 다른 이슬람 무장조직 알카에다도 변수다. 9ㆍ11테러를 주도했던 알카에다와 탈레반은 미국에 대항해 20여 년간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 왔지만, 탈레반의 아프간 장악으로 세력을 더 확장시킬 가능성이 있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미군이 철수하면서 아프간은 IS와 탈레반, 알카에다의 주요 전장이 될 수 있다”며 “탈레반의 아프간 장악으로 혼란이 지속될수록 테러 조직들이 혼란을 악용할 여지가 많다”고 전망했다.
IS가 본격적으로 반(反)탈레반 세력을 규합해 탈레반과 본격적인 주도권 경쟁에 나설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이날 “IS의 입장에서는 최대의 적인 미국은 물론이고 대립적 갈등 관계를 이어온 탈레반에 타격을 안긴다는 점에서 조직적 테러 공격을 기획했을 가능성이 크다”며 “특히 중동 전역에 퍼져 있는 IS가 (미군이 없는) 아프간으로 집결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탈레반이 IS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과 공조할 가능성마저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IS에 보복을 가하겠다고 공개 선언하고, 미군에 IS 지도부와 시설을 타격할 작전계획을 수립하라고 지시했다. 탈레반이 장악한 아프간에서 작전을 수행해야 하는 미국으로서는 탈레반과의 공조가 불가피하다. WSJ는 이날 “카불 공항 테러는 아프간 내에서 더 길고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망령을 불러일으켰다”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