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식을 보면서 한 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왜 우리가 애국자라 부르는 사람은 독립운동가나 전쟁 영웅 일색일까? 아마도 식민체험과 분단의 역사 속에서 당장 다급한 국가의 존립을 위해 싸우는 것만큼 절박한 것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국가 간 스포츠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을 ‘국위선양’으로 환호하는 스포츠 애국주의도 약소국의 불가피한 대리만족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근대사의 한 시점까지는 애국에 대한 이런 생각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정치적 민주화를 이룬 세계 9위의 경제 대국으로, 세계가 선진국으로 인정하는 지금도 이런 생각이 유효할까? 외부의 침략에 맞서는 인물상을 애국자의 표본으로 전제하는 군사주의 투쟁 프레임으로 현재 우리 사회에 필요한 애국을 설명할 수 있을까?
애국은 자신이 속한 국가라는 정치공동체가 더 나아지도록 노력하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럼 무엇이 더 좋은 국가공동체를 만드는가. 난 주저하지 않고 '더 많은 민주주의'라고 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결국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삶을 가장 풍요롭게 하는 길이며, 국가의 궁극적 존재 이유는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성숙은 정치적 민주화, 경제적 민주화, 문화적 민주화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현재의 한국은 정치적 민주화는 이루었지만, 경제적 민주화는 답보상태이며 개인의 권리가 일상에서 존중되는 정도를 의미하는 문화적 민주화는 열악한 수준이다. 모든 유권자가 1인 1표를 행사하고 있지만, 빈부 격차는 더 벌어지고 각종 차별과 혐오가 난무한다. 한국 민주주의의 성숙을 위해 우선적으로 필요한 건 더 많은 문화적 민주화이다.
양궁 종목에서 올림픽 첫 3관왕을 달성하고도 숏커트라는 이유로 페미니스트로 인식되면서 심한 사이버 폭력을 당한 안산 선수의 사례를 보자. 낡은 스포츠 애국주의 시각으로 보면 그는 '국위를 선양한 애국자'이다. 하지만 세계가 선진국으로 인정한 한국의 국가이미지가 올림픽에서 금메달 몇 개 더 딴다고 달라지겠는가. 오히려 아프간 난민 문제에 어떤 대응을 하고 성평등 지수가 어느 정도인지가 훨씬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선진국 이미지에 결정적인 것은 경제력과 문화적 민주화의 수준이다.
나는 '국위선양'과 전혀 다른 이유로 안산 선수가 애국자라고 생각한다. 안산 선수는 올림픽 3관왕의 위업을 달성한 유능한 여성도 주체성의 단서(여기서는 우스꽝스럽게도 숏커트)를 보이면 집단적 폭력에 노출되는 성차별적 현실을 드러낸 피해자 주인공이다. 부당한 폭력을 당당하게 받아내는 모습을 연기함으로써 후진적 성평등 현실에 대한 전 국민적 각성의 계기를 제공했다. 본인이 고통을 당하면서 결과적으로 문화적 민주화를 진일보하는 데 기여한 이것이 애국이 아니면 무어란 말인가.
이제 애국은 '어떤 민주주의를 통하여 더 좋은 국가를 만들 것인가?' '일상에서 더 많은 민주주의는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축으로 한국 사회 내부를 성찰하고 개혁하는 방향으로 상상되어야 한다. 거기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하는 것은 여성의 일반 삶에 대한 사회적 재평가이다. 돌봄처럼 전사회적인 토대를 떠받치고 있지만 평가받지 못한 여성 노동에 대한 정당한 가치 인정이 이뤄질 때 우리의 문화적 민주화는 진일보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