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가시는 거죠? 일 힘들다고."
아픈 아이를 돌봐야 해서 육아휴직을 쓴다는 제게 A팀장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업무 받을 사람 없으면 못 쓴다", "갔다 왔을 땐 자리 없다"며 계속 압박했어요. 휴직 의사를 밝힌 뒤엔 이유 없이 금요일 연차를 못쓰게 했어요. 그러더니 12년차인 제게 번역이나 엑셀 정리 작업 같은 단순 업무를 시키더군요. 제 육아휴직 기안서로는 책상을 '탕탕' 내리치면서 무조건 다시 올리라고만 했어요.
사실 A팀장의 이런 태도는 놀랍지 않았습니다. 지난해 말 조직 개편 후 상사로 만난 그는 직원들을 괴롭히는 걸로 유명했거든요. 못 견딘 직원들이 줄줄이 퇴사할 지경이었죠. 퇴사자들 업무는 고스란히 제게 쌓였어요. 사실 제가 그 일을 순순히 하지 않으면 무능력자 취급을 받을까봐 두렵기도 했어요. 팀장은 "회사에 블랙리스트가 있는데, 거기 오르면 회사에서 잘린다"고 협박하거나 퇴사자를 두고 "무능력자"라고 욕했는데, 저도 무능력자 취급을 받거나 블랙리스트에 오를까봐 무서웠어요.
A팀장은 입이 거칠었어요. 업무 지시를 할 때면 "생각하지 말라"거나 "시키는 대로나 하라"고 폭언했죠. 일하는 중에도 수시로 제 자리로 와 "이거 했냐"고 윽박을 지르거나 한숨을 푹푹 쉬고요. 회사 동료들 다 보는 자리에서요. 아예 제 등 뒤에 버티고 서서 모니터를 지켜보면서 "빨리 하라"고 다그친 적도 여러 번이에요. 팀원들이 저한테 "A팀장 대체 왜 계속 그러냐" 걱정할 지경이었다니까요.
한 번은 제가 사는 지역을 두고 '망한 동네'라며 "그런 동네에서 뉴욕보다 더 비싼 동네로 출근한다"고 비아냥거리더라고요. 제가 "기분이 나쁘고 업무와도 상관 없는 발언이니 사과해달라"고 했는데도 그는 조롱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업무 메신저에선 정치인 욕을 계속 해댔어요. 제가 동조하지 않고 업무 이야기만 하자 제 자리로 와서 감시하고 윽박지르는 일은 더 심해졌고요. 그 팀장 때문에 저는 우울증, 불면증에 걸리고 말았지요.
그 와중에 제 개인적인 일로 육아휴직을 쓰게 된 셈인데요. 아이 아픈 건 누구보다 제가 속상한데, 마치 제가 회사 일을 쉬고 싶어서 육아휴직을 쓴다고 소문을 내더라고요. 또 제 뒤에선 제 아이를 두고는 "어디 문제가 있냐"고 하거나 어디가 아픈지를 캐내고 다니고 있다고 동료들이 말해줬어요. 더는 참을 수 없었습니다.
간단한 방법은 제가 회사를 그만 두는 것이었겠지만, 제가 도망갈 이유는 없었어요. 제겐 아이와 아내가 있고, 제 경력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고요. 휴직을 한 달 앞둔 시점, 저는 회사에 직장 내 괴롭힘을 조사해달라고 신고한 뒤 노동청에도 고발했어요. 회사에서 조사위원회가 열리긴 했는데, A팀장의 가해 행위가 인정되지 않는다더라고요. 녹취록, 메일, 메신저 등 증거뿐만 아니라 그 팀장 때문에 퇴사하신 분들의 증언까지 있었는데도요. 제 사연을 아는 노무사도 납득이 안된다는 반응이었습니다. 노동청 고발 결과는 아직인데, 저는 조만간 휴직을 마치고 복직합니다. A팀장 얼굴을 어떻게 다시 보고 그와 함께 일할 수 있을까요. 무섭고 막막합니다.
B씨(30대 남성·전자업종 사무직)
헌법 제10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고 보장합니다. 일터에선 내가 가진 능력을 발휘해 일로 성취를 얻으며 자아를 실현하고 돈을 벌어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지요. 그러한 일터에서 업무상 지위를 이용해 괴롭혀선 안 된다는 게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의 취지입니다.
정당한 이유 없이 차별 대우를 하고, 힘든 업무를 반복적으로 주거나 갑자기 허드렛일만 시키는 경우, 개인적인 일을 소문내거나 뒤에서 욕을 하는 경우.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예시입니다. 지난 2019년 7월 16일부터 근로기준법에선 직장 내 괴롭힘을 금지하고 있어요. 이에 따라 "직장에서 사장 또는 상사가 지위나 우위를 이용해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어 정신적·신체적으로 괴롭히는 행위"를 하면 안 돼요.
B씨는 팀원으로서 A팀장의 업무 지시를 받는 입장이고, 이에 따라 그의 행동이 부당하다고 느껴도 매번 지적은커녕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기 어려웠을 거예요. 심지어 "불쾌하다. 사과해달라"고 요구하자 더 심하게 괴롭혔다니요. 이처럼 업무상 필요성이 있었다고 해도 그 말이나 행동이 사회 통념상 '선을 넘었다'면,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이 돼요.
먼저 B씨가 당한 일을 먼저 하나씩 뜯어 보고 왜 '직장 내 괴롭힘'으로 성립되는지를 볼게요.
△육아휴직 거부 및 부당하게 연차 사용 반려하기
육아휴직 사용을 거부하는 사업주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이 부과돼요. 정당한 사유(재직 기간 6개월 미만일 경우 등) 없이 거부당했다면 노동청 진정을 통해 시정을 요구하는 게 빨라요. 회사에 육아휴직을 쓰겠다고 제출한 신청서와 메일, 상사와 대화를 녹음한 파일 등을 증거로 확보해두면 좋겠죠. 특정인의 연차 사용을 합당한 이유 없이 반려하는 것도 괴롭힘에 해당하는 행위입니다.
△'모 아니면 도' 업무 몰아주기 또는 허드렛일만 시키기
B씨는 퇴사자들의 업무를 넘겨받을 때 "블랙리스트에 오를 수 있다"거나 "퇴사하면 무능력자"라는 식의 가스라이팅(타인의 심리를 교묘히 조작하며 지배력을 강화함)을 당했군요. B씨는 퇴사자들의 업무를 맡은 뒤엔 밤낮없이 해야 겨우 마칠 수 있는 수준이었다고요. 이렇게 모두가 꺼리는, 힘든 업무를 반복적으로 B씨에게만 주거나, 돌연 원래 하던 직무가 아니었던 번역, 엑셀 정리와 같은 허드렛일만 시키는 것 모두 괴롭힘 행위에 해당합니다.
△ 온·오프라인상 폭언이나 모욕적인 언행
"생각하지 마!" "시키는 대로 해!" 폭언은 안 돼요. 특히 팀장이 팀원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건 위협이 될 수 있고요. B씨 자리 뒤에 빤히 서서 모니터를 바라보는 것도 "특정 직원의 업무 감시"라는 직장 내 괴롭힘 행위 예시에 해당합니다. 정치 평론이나 거주 지역 비하도 업무 외 사적인 영역 침범이에요.
직장 내 괴롭힘 분야의 전문가인 시민단체 직장갑질119와 노무사 여러명이 본 B씨 건은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하는데도, 회사가 "아닌데"라고 했을 때 그 결정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은 노동청의 조사 결과뿐입니다.
그나마 B씨는 육아휴직 중이셔서 사정이 나으신 편이랄까요. 만약 휴직이라는 선택지가 없다면, 노동청 결과를 기다리는 통상 두달 동안 괴롭힘 행위자와 일을 해야 할 테니까요. 회사가 괴롭힘 행위를 확인하는 기간 연차를 부여할 수 있는 조항이 근로기준법에 있긴 한데, 강제할 수는 없다는 게 흠이죠.
B씨 걱정대로 복직하신 뒤엔 A팀장을 만나실 텐데요. 만약 A팀장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으셨다면 즉각 '사업주'를 찾아가셔야 해요. 만약 B씨가 신고 후 불리한 처우를 받았는데, 사업주가 이를 알고도 묵인한 경우 그 책임을 물을 수 있거든요. 만약 신고자에게 부당한 전보나 해고 등 불리한 처우를 했다면 사업주는 3년 이하 징역, 3,000만 원 이하 벌금에 처해질 수 있답니다.
직장 내 괴롭힘 좀 줄어들면 좋을 텐데, 한계는 현행법에도 있어요. 증거 자료 등을 통한 입증 책임은 근로자에게만 있다는 점, 또 회사에서 객관적이고 공정한 조사위원회를 구성할 거라고 믿기 어려운 점이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B씨 사례처럼 증거와 증언도 많고 기민하게 대응을 해도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정받기 어려운 게 현실이거든요. 오는 10월부터는 상황이 좀 바뀌려나요. B씨가 당한 일처럼 회사가 객관적으로 조사했다고 보기 어려울 경우 10월 14일부터는 500만 원 이하의 과태료라는 벌칙조항이 생겨요.
직장갑질119가 지금껏 본 직장 내 괴롭힘 사례를 보면 열에 일곱은 회사가 돈을 주고 자문을 하는 노무법인에 직장 내 괴롭힘 조사를 의뢰한다고 하는데요. 돈을 회사로부터 받는 노무법인이 과연 얼마나 객관적으로 사건을 볼 건지 의문이 남죠. 김용선 노무사는 "직장 내 괴롭힘 행위를 조사하는 기구를 구성하는 권한이 회사에만 있다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어요. 김 노무사는 "조사 위원에 대한 공정성이 명확하게 확보돼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면 보통 회사 자문 노무사가 사측의 편에서만 해석할 여지가 있다"며 "괴롭힘 피해를 주장하는 근로자와 가해자로 지목된 사업주 또는 근로자 모두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는 조사 위원을 선정하도록 규정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회사 생활을 하며 말 못할 어려움을 겪고 있거나 해결책이 궁금하시다면 누구라도 제보를 해주세요. 이메일(119@hankookilbo.com)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선정되신 분의 사연과 상담 내용은 한국일보에 소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