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기업하면 먼저 떠오르는 곳이 대당 2,000억 원을 호가하는 네델란드 ASML의 노광장비가 줄지어 서 있는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다. 그만큼 반도체는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는 장치 산업이다. 생산을 하지 않고 설계만 하는 퀄컴, ARM, 애플 등 팹리스 업체들도 연간 수 조원대 연구개발비를 쏟아 붓고 있다. 따라서 반도체는 신생기업(스타트업)이 도전하기 힘든 분야다.
그런데 여기에 도전장을 낸 국내 스타트업이 있다. 지난해 9월 설립된 리벨리온은 맞춤형 인공지능(AI) 반도체를 설계하는 스타트업이다. 설계만 하고 생산은 하지 않은 팹리스인 이 곳은 설립 1년 만에 벌써 300억 원 이상을 투자 받았다. 아직 제품이 나오지도 않은 이 곳에 카카오벤처스, 신한캐피탈, 서울대기술지주 등이 앞다퉈 투자한 이유는 '사람' 때문이다.
리벨리온은 덩치만 보고 무시하면 안 된다. 경기 분당에 둥지를 튼 이 업체는 박성현(37) 대표를 비롯해 IBM, 인텔, 스페이스X 등에서 반도체를 연구한 박사급 인력 30명이 포진해 있다. 단순히 박사 학위 소지자들만 모인 것이 아니라 개개인이 반도체 분야의 스타들이다. 덕분에 지난 5월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한 'K반도체 전략보고'에 삼성전자, SK하이닉스와 함께 스타트업 중 유일하게 리벨리온이 참가해 눈길을 끌었다.
과연 얼마나 대단하길래 주목을 받는지 궁금해 리벨리온의 분당 사무실로 찾아가 5명의 공동창업자 중 박 대표와 오진욱(37) 기술총괄(CTO), 김효은(38) 제품총괄(CPO)을 만났다. 세 명 모두 반도체 관련 박사 학위와 수 많은 경험을 갖고 있다.
마침 찾아간 날이 전체 직원이 모여 회의하는 오렌지 미팅 데이였다. 문을 밀고 들어서니 직원들이 사무실을 텅 비워둔 채 커다란 회의실에 모여 있었다.
박성현: "매주 수요일마다 모여서 진행 상황을 점검해요. 여기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고 고칠 것을 바로 잡죠. 그래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상황에서도 재택 근무를 하지 않아요. 빨리 성과를 내기 위해 모여서 집중적으로 일하죠."
오진욱: "건물 2개층을 쓰는데 층별로 반도체를 구동하는 소프트웨어 개발과 하드웨어(칩) 개발 등 기능별 인력이 모여 있어요. 필요하면 바로 상의할 수 있는 구조죠."
-박 대표 명함을 받아보니 특이하게 직함 대신 ‘AI 액셀러레이터 & 시스템’이라고 적혀 있다.
김효은: "과장, 부장 등 직급이 없고 서로 이름을 불러요. 명함에도 동등하게 하는 일만 표시해요.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은 'AI 소프트웨어 & 알고리즘', 칩 개발자들은 'AI 액셀러레이터 & 시스템'으로 적혀 있죠."
박: "직원들이 스스로 의사결정을 내리도록 직급을 없앴어요. 작은 스타트업이 빠르게 치고 나가려면 직원들이 자유롭게 소통하며 합리적 결정을 해야죠. 대신 직원들을 결정을 맡길 수 있는 최고 실력자들로 뽑아야죠. 굉장히 어려운 일이지만 이것이 스타트업이 싸우는 방식이에요."
-반도체 설계는 스타트업도 가능한가.
오: "설계는 똑똑한 두뇌만 있으면 돼요. 중요한 것은 오랜 경험과 전문 지식이에요. 반도체는 경험 없이 개발하면 망칠 확률이 높아요. 전체 직원 32명이 모두 반도체 분야에서 다년간 경력을 쌓았어요. 우리는 15년 이상 반도체 설계를 한 개발자들이 수두룩 합니다."
박: "한국은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너무 잘하죠. 이 경험이 비모메리, 즉 시스템 반도체로 번져 나가는 과정에서 시행착오가 많았어요. 그러면서 성공과 실패의 노하우가 쌓였죠. 반도체는 실패 노하우도 큰 자산이 됩니다. 우리는 이런 경험을 가진 개발자들을 모았어요. 대한민국 시스템 반도체의 성공과 실패를 집약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반도체를 개발하나.
오: "우리는 물리적인 칩과 이를 구동하는 컴파일러, 알고리즘 등 소프트웨어 개발까지 모두하는 '풀 스택 솔루션' 업체에요. 아무리 칩을 잘 만들어도 여기에 최적화된 소프트웨어가 없으면 성능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어요. 한마디로 명품 자동차를 만들고 이를 운전하는 최고 실력의 운전사까지 제공하죠."
김: "우리는 시장 맞춤형 AI 반도체를 만들어요. 자율주행, 클라우드 서버, 금융기술(핀테크), 의료 등 각 분야별로 적합한 AI 반도체를 각각 개발하죠."
박: "저는 인텔과 스페이스X를 거쳐 모건스탠리에서 금융 기술을 연구했어요. 김 박사는 의료기술 스타트업 루닛에서 CTO를 지냈고, 오 박사는 IBM에서 클라우드 서버용 반도체를 설계했죠. 다들 다양한 분야의 경험이 있어서 전문성과 시장의 요구를 잘 알아요."
-시장 맞춤형 AI 반도체는 어떤 장점이 있나.
오: "기존 범용 AI 반도체보다 10배 이상 높은 성능을 낼 수 있어요. 과거 반도체들이 공급업체 중심으로 설계됐다면 우리가 만드는 시장 맞춤형 AI 반도체는 사용자 중심으로 설계해요. 그만큼 시장에 특화돼 해당 기업들도 운전하기 쉬운 스포츠카처럼 쉽게 다룰 수 있죠."
-대신 범용 반도체보다 시장 맞춤형은 시장이 작지 않나.
김: "AI 반도체 시장은 100조 원 규모를 향해 달려가고 있어요. 세분화 돼야 시장이 더 커집니다. 우리 반도체는 핵심(코어) 설계를 조금만 바꾸면 고사양(하이엔드)과 저사양(로우엔드)을 모두 만들 수 있어서 세분화 된 시장에 다양하게 대응할 수 있죠."
-첫 제품은 언제 나오나.
박: "10월에 금융 분야에 특화된 첫 번째 AI 반도체 '이온'(ION)의 시제품이 나와요. 개발이 끝나 설계도면이 대만의 위탁생산업체(파운드리) TSMC에 넘어갔어요. TSMC에서 7나노 공정을 이용해 시제품을 만들고 있습니다. 정식 출시는 올해 말이에요. 이온은 월스트리트에 있는 금융업체들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오: "이온은 가로, 세로 크기가 각 2㎜에 불과해요. 반도체는 작게 만들수록 힘들어요. 휴대폰에 들어가는 응용프로세서(AP) 크기가 가로, 세로 각 1㎝인 점을 감안하면 아주 작죠."
-두 번째 제품 계획도 있나.
오: "두 번째 제품 '아톰'은 클라우드 데이터 센터용 AI 반도체로 내년 6월에 개발 완료 목표입니다. 이 칩은 가로, 세로 각 1.3㎝센티 크기에요. 아톰은 네이버, 카카오 등 클라우드 센터를 운영하는 IT기업들이 대상입니다."
김: "아톰은 삼성전자에서 5나노 공정을 이용해 생산합니다. 내년 6월에 삼성전자에 설계도면을 넘기면 내년 말에 시제품이 나올 겁니다."
-생산업체로 TSMC와 삼성전자는 어떻게 선택했나.
박: "첫 번째 제품은 삼성전자와 TSMC에 모두 연락했는데 TSMC에서 연락이 왔죠. 그런데 두 번째 제품은 삼성전자에서 먼저 연락이 왔어요 대통령 보고행사에 참석하면서 주목을 받았죠."
-세 번째 칩도 준비중인가.
오: "세 번째 칩은 대량 생산하는 양산용이에요. 첫 번째와 두 번째 칩의 시제품 반응을 보고 시장에 최적화된 개량형 양산칩 '리벨 1.0'을 세 번째로 내놓을 겁니다. 만약 두 가지 반응이 모두 좋으면 '리벨 파이낸스' '리벨 클라우드' 등 두 종류의 양산품이 나올 수 있죠. 2024년 양산이 목표인데 이 제품 나오면 미국 증시에 상장을 추진할 생각이에요.
-많은 스타트업들이 시장과 인력을 찾아 미국에서 창업한다. 그런데 리벨리온은 한국을 선택했다.
박: "미국 창업을 검토했으나 한국이 갖고 있는 자산, 즉 개발자들 실력이 너무 좋아 한국을 택했어요. 미국이 칩 분야에서 지는 해라면 한국은 이런 자산을 갖고 로켓처럼 날아오를 일만 남았죠."
오: "미국도 정부에서 반도체에 투자를 많이 하지만 시장 분위기가 바뀌었어요. 반도체 설계와 개발은 공부도 오래해야 하고 힘들다 보니 사람들이 기피하죠. 미국 대학들은 컴퓨터공학 전공과 전자공학 전공을 같이 뽑는데, 모두 소프트웨어 개발하는 컴퓨터공학으로 넘어가요. 미국은 서비스업에 AI를 접목해 돈을 잘 벌다 보니 우수 인력들이 페이스북 등 서비스 분야에 모입니다. 반면 한국은 우수 인력들이 전자공학에 지원을 많이 하죠."
박: "미국에서 공부한 아시아인들이 모두 본국으로 돌아가 일을 합니다. 반도체 분야에서 차세대 스타 기업은 한국 대만 인도 등 아시아에서 나올 겁니다. 그동안 큰 기술 격차로 이끌었던 미국은 이제 변곡점을 지나 떨어지고 있죠. 미국이 반도체 산업을 부흥시키려면 한국, 대만, 인도, 이스라엘의 관련업체들을 인수합병(M&A) 해야 합니다. 그래서 미국 기업들이 우리에게 M&A 관련해 연락을 많이 하고 있어요."
-구글이나 페이스북 등 비반도체 기업들도 요즘 반도체를 개발한다. 그만큼 경쟁이 힘들지 않나.
오: "테슬라, 스페이스X, 보잉도 반도체를 만들어요. 이제 IT관련 기업들은 사업에 필요한 반도체를 만드는 것이 필수죠. 하지만 반도체 개발은 생각보다 힘들어요. 많은 돈을 들여서 사람을 뽑으면 적당히 경험을 쌓아서 뛰쳐 나갑니다."
인터뷰가 두 시간을 넘어가자 오 CTO와 김 CPO는 다음 일정 때문에 먼저 일어섰다. 혼자 남은 박 대표에게 리벨리온의 경쟁력을 물어봤다.
“인력이죠. 전세계 반도체 업계에서 유명한 전문가들이 모여 있어요. 제 입장에서는 자존심 상하는 얘기일 수도 있는데, 해외에 나가면 사명보다 '오진욱 팀'으로 유명해요. 회사 이름은 몰라도 오진욱 있는 회사라면 대번에 알죠. 오 박사는 IBM 왓슨연구소에서 7년간 AI 반도체의 핵심 설계를 담당한 리드 아키텍터였어요. 한마디로 반도체 분야의 스타에요. 지금도 구글, 페이스북 등 유명 IT기업들은 물론이고 미국 대학들에서도 오 박사 스카우트를 위한 연락이 많이 와요.”
“김 CPO는 삼성전자에서 그래픽 반도체(GPU)를 개발한 국내 스타트업들 사이에 알아주는 개발자죠. 그가 어디로 움직였느냐가 화제가 될 정도에요.”
원래 박 대표는 인터뷰 전에 세 사람이 꼭 같이 해야 한다고 고집했다. 설명을 들으니 공동 인터뷰를 고집한 까닭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세 사람은 어떻게 만났나.
박: “3명 모두 반도체 설계를 전공했어요. 저는 경남과학고를 2년 만에 마치고 카이스트에서 학사, 미국 MIT에서 반도체 설계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어요. 오 CTO는 서울대 학사를 하고 카이스트에서 박사를 했는데 그때 알았죠. 그는 박사 과정 때부터 유명했어요. 오 CTO와 아주 친한 김 CPO는 카이스트에서 GPU 설계로 박사 학위를 받았죠."
-박 대표는 이전에 어떤 일을 했나.
"MIT를 나와 인텔 연구소에서 사물인터넷(IoT)용 중앙처리장치(CPU)를 설계했어요. 당시 인텔에서는 PC용 CPU 시장을 평정했다고 생각해서 경쟁을 하지 않아 재미가 없었어요. 그래서 IoT CPU 등 새로운 분야를 더 알아줬죠. 이후 일론 머스크의 우주개발업체 스페이스X에서 인공위성용 반도체를 개발했어요. 돈 많이 벌고 싶어서 모건스탠리에서 금융 반도체 담당 임원을 지냈구요. 미국 금융업체들도 AI 분석 등을 위해 특화된 반도체를 원하거든요."
-그럼 수십억 원 연봉을 포기하고 창업한 것인가. 아니면 여기서도 그만큼 받나.
"지금 CEO 연봉은 8,000만 원이에요. 나중에 글로벌 기업에서 일하는 것보다 더 큰 부자가 될 수 있어서 힘들어도 즐겁게 일합니다. 직원들은 정시 퇴근해도 창업자들은 새벽 3,4시까지 일해요. 우리끼리 제발 해뜨기 전에 들어가자는 말을 하죠. 창업자들은 인생을 걸었으니 그렇게 일해야 합니다. 주인의식이 있어야 창의력이 나오는데 대기업에서는 이게 안되니 몸 바쳐 일하기 힘들어요."
-당신들이 그리는 꿈은 무엇인가.
"우리의 알파와 오메가는 시스템 반도체입니다. 대한민국에 제대로 된 시스템 반도체 회사를 만드는 겁니다. 비메모리 분야에서 제2의 삼성전자가 되고 싶어요. 우리 직원들 같은 인력을 모으기 힘든데 이를 해냈어요. 좋은 인력이 있어서 투자를 받았고 이를 토대로 좋은 인력을 더 뽑을 수 있죠. 성공이든 실패든 계속 도전해야 관련 산업이 발전하고 그래야 이 땅에 유산으로 남습니다. 우리가 사라져도 좋은 유산으로 후배들에게 전해졌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