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 올레길만 있는 건 아니다. 사람이 사는, 여느 곳처럼 가도가 있고 그 사이를 촘촘히 잇는 골목이 있다. 뭍에서 온 객들에겐 그렇고 그런 거리일 수 있다. 그러나 상전벽해한 제주 옛 풍경을 기억하고 있는 중년 토박이들이 모이면 그곳을 떠올린다. 일상의 중심이던 제주 원도심이다.
그도 그럴 것이 1990년대까지만 해도 제주 도심부는 서울 명동이 부럽지 않았다. 뿌연 담배 연기 속에 턴 테이블이 돌던 음악다방과 데이트 필수 코스이던 영화관이 몰려 있고, 낮에는 옷가게와 서점, 분식점 등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발길이 물결을 이뤘다. 날이 어두워지면 수많은 청춘들이 구석구석 들어앉은 술집과 식당을 찾아 골목을 휘젓고 다녔다.
그러나 제주 원도심은 각종 개발사업 과정에서 배제되면서 쇠퇴했고, 빈 점포가 늘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들었다. 줄어든 발길은 빈 점포를 더 늘리며 일대는 악순환했다. 푹푹 꺼지기만 하던 그곳에 6년 전 원도심 재생사업이 시작되면서 기류에 변화가 생겼다. 최근 불기 시작한 레트로(복고풍) 열풍도 이곳 원도심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제주 원도심은 행정구역상 제주시 삼도2동과 일도1동, 건입동까지 포함된다. '중앙로' '구제주' 등으로 불리는 옛 시가지인 원도심 복판엔 오랜 시간 제주 사람들과 함께해 온 관덕정이 있다. 국가지정 보물 제322호인 관덕정은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다. 조선시대 왜구 토벌을 위해 병사의 훈련장으로 세워졌다. 이후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 70∼80년대까지 제주의 정치·역사·문화·교통의 중심지였다.
관덕정은 제주 4·3사건의 도화선이 된 1947년 삼일절 기념행사가 열린 역사적 현장이다. 그 광장에 설치된 분수대는 기념 사진을 찍거나 만남의 장소 역할도 했던 친근한 장소였다. 500년 넘게 섬 사람들과 희로애락을 함께해 온 관덕정은 이제 제주의 과거와 현재를 함께 마주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관덕정을 끼고 동쪽으로 걸으면 원도심의 핵심 거리인 칠성로를 만난다. ‘칠성통’으로 불리는 칠성로는 관덕정에서 시작해 반대편 산지천까지 이어진다. 도보로 15분 정도면 닿을 수 있는 거리다. 비가 오는 날씨에도 우산 없이 걸을 수 있는 캐노피 구조물이 설치된 쇼핑 거리 양쪽으론 주로 의류 관련 매장들이 문을 열어놓고 있다.
칠성로 초입에는 80∼90년대 음악다방을 대표하던 ‘심지’가 2년 전 다시 간판을 달고 20여 년 만에 영업을 재개했다. 심지는 손님이 신청곡 메모지를 DJ박스 구멍으로 넣으면 DJ가 사연과 함께 음악을 틀어주던 ‘DJ음악다방’이었다. 386세대 대학생들은 칠성통 곳곳에서 영업하던 음악다방을 아지트 삼아 청년문화를 향유했다.
새로 문을 연 카페 심지엔 옛 심지의 추억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이 때문에 20·30대에게는 레트로 감성을 충전시킨다. 그들 부모 세대인 50·60대들은 이곳에서 추억을 소환할 수 있다. 심지를 되살린 김경은(50) 대표는 “칠성통은 유년기부터 대학시절까지 놀고 자란 고향"이라며 "원도심의 과거와 현재를 잇고 싶다는 생각에 2년 전 문을 열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침체한 상권을 감안하면 무모한 도전이었지만, 심지를 기억하고 일부러 찾아왔다는 손님을 맞을 때, 또 심지에서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 가는 이들을 볼 때면 힘이 난다며 활짝 웃었다.
칠성통은 청년문화의 중심지이면서도, 상업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칠성통과 바로 연결된 중앙로 지하상가에는 각양각색의 점포들이 성업했다. 주말이나 명절 등에는 칠성통 거리와 지하상가에는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많은 이들이 쇼핑을 즐겼다. 인파가 몰리는 상권인 만큼 고급 제과점과 초밥집, 레스토랑에다 술집들도 즐비했다. 지금은 식당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지만, 이름만 꺼내도 알 만한 유명 맛집들은 원도심 곳곳에 자리를 지키고 있다.
최근엔 젊은층이 선호하는 트렌드에 맞춘 음식점과 커피숍, 독립서점 등이 원도심의 빈자리를 하나둘씩 다시 채우고 있다. 또한 제주올레 17·18코스가 원도심을 지나고, 전통시장인 동문시장이 관광객들에 큰 인기를 끌면서 원도심에도 생기가 돌고 있다.
원도심을 찾는 관광객과 도민들이 늘면서 제주시는 원도심의 역사‧문화·관광자원과 볼거리, 먹거리 등을 연계한 걷기여행코스인 ‘원도심 심쿵투어’를 개발해 운영하고 있다. 3개 코스로 이뤄진 원도심 심쿵투어에서는 그동안 기존 관광지에서는 접하지 못했던 제주도민들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오래된 맛집들과 점포, 차량이 진입할 수 없을 정도로 좁은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골목길인 ‘올레’ 등 색다른 도심여행을 즐길 수 있다.
최근 제주시 원도심 변화 중심에는 2016년 시작한 ‘원도심 도시재생사업’이 자리하고 있다. 제주도시재생지원센터는 올해까지 6년간 사업비 181억 원을 투입해 원도심 내의 역사‧문화 자원을 활용한 다양한 재생사업을 진행 중이다.
“옛것을 살려 미래를 일구다”라는 주제로 이뤄지는 제주 원도심 재생사업은 말 그대로 기존에 있는 낡은 것들을 모두 없애고 새로 만드는 게 아니라, 지역주민들과 머리를 맞대 낡았지만 친숙한 기존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제주북초등학교의 김영수도서관, 유휴공간이었던 옛 관사와 창고를 리모델링해 학교와 지역주민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한 마을어린이도서관 등이 대표적인 사업이다. 기획 단계부터 도서관을 이용할 학생과 주민들이 참여했다. 김영수도서관은 국토교통부 주관 ‘2020년 대한민국 공공건축상’ 공모에서 공공건축 부문 대상을 차지하기도 했다. 김영수도서관 외에도 칠성로를 따라 걷다 보면 도시재생사업 거점 현장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청사 이전으로 수년간 비어 있던 옛 제주기상청 건물도 도시재생 사업을 통해 혁신창업 지원 및 스타트업 육성공간인 ‘W360’으로 탈바꿈했다. 'W'는 바람(Wind, 새로운 바람이 부는 곳), 관찰(Watch, 세상을 바라보는 곳), 바람(Wish, 꿈이 이뤄지는 곳)의 영문 철자에서 땄다. 그리고 '360'은 각도의 한계를 두지 않고 세상을 바라본다는 의미의 ‘360도’에서 가져왔다. 이 외에도 철거 위기의 옛 고택을 리모델링한 제주책방과 제주사랑방, 원도심과 관련된 사업을 하거나 창업을 준비하는 사업자와 창업자들의 공유공간인 도시재생 디자인공장, 사라져 가는 제주음식문화를 주민들과 함께 연구하고 공유하는 커뮤니티 공간인 케왓 등도 또 다른 원도심의 볼거리다.
제주도시재생센터는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한 유일한 왕 ‘광해군’ 이야기를 원도심 활성화 사업과 연계시켰다. 센터는 원도심 내 음식점과 카페, 기념품점 등 지역상인들과 함께 임금님에게 올리는 작은상 한상차림 ‘광해소반’, 광해군이 즐겨 먹은 것으로 알려진 ‘광해보리꽈배기’, 광해군의 시를 담은 유리문진 등 광해군 테마 상품을 개발했다.
또 이들 테마 상품을 판매하는 원도심 업체들과 광해군과 관련된 역사유적을 연결한 원도심 걷는 길 프로그램인 ‘광해군과 함께하는 원도심 시간여행’도 선보였다. 이 길 코스를 따라 걷다 보면 제주에서 삶을 마감해야 했던 비운의 왕인 광해 삶의 여정을 들여다볼 수 있다.
제주도시재생센터는 도시재생형 창업지원프로그램 운영을 통해 쇠퇴한 칠성로 상가에 생기를 불어넣는 작업인 ‘도시재생 스타트업 챌린지’도 진행하고 있다. 칠성로 상점 주인들과 상생협약을 맺어 빈 점포에 청년창업자들이 다른 곳보다 싼 임대료로 입점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등 창업을 통해 침체된 칠성로 상가를 활성화시키겠다는 계획이다.
10일엔 청년창업 1호점인 ‘섬마을 과자점’이 문을 열었다. 서울 출신의 김지은(35) 대표는 “제주가 너무 좋아 다니던 제빵제과 관련 직장을 정리하고, 아예 내 가게를 열었다”며 “다른 청년창업 업체 10여 개가 추가로 문을 열면 칠성로 일대도 핫플레이스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