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건강한 페미니즘이 뭐길래 (8월 12일자)
독자님 안녕하세요. 한 달 전 허스토리의 약속 기억하시나요? 대선 주자들이 등장할 때마다 젠더 렌즈로 후보들과 정책을 살펴보겠다는 약속이요! 그래서 이번 주에는 "페미니즘도 건강한 페미니즘이어야 한다"는 60대 남성 예비 대선후보의 의식을 짚어보려고 해요. 머리 모양으로 미뤄 페미니스트로 짐작된다며 올림픽 국가대표 선수에게 온라인 학대가 행해지고, 초등학교 성평등 교육이 '페미니즘 세뇌'라며 공격당하는 사회에서 남성 정치인들이 말하는 '건강한 페미니즘'은 대체 무엇일까요?
무슨 말을 했길래…
건강한 페미니즘 발언의 주인공은 국민의힘 예비 대선주자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 지난 2일 국민의힘 초선 의원 모임에 참석한 그는 페미니즘을 저출생 원인으로 진단합니다. "페미니즘의 정치적 악용이 남녀 간 건전한 교제도 정서적으로 막는다는 얘기도 있더라"라면서요. 기자들이 페미니즘 발언의 맥락을 묻자 "그런 주장을 하는 분이 있기 때문에 언급한 것"이라며 전해 들은 말임을 강조했는데요. 자신이 생각하는 건강한 페미니즘에 대해선 "선거를 유리하게 하고 집권을 연장하는데 악용돼서는 안 된다"고 답했습니다.
윤 전 총장은 이로써 납작한 성평등 관점 4종 세트를 완성했습니다. 1) 임신, 출산, 돌봄의 과정에서 여성들이 어떤 고민을 맞닥뜨리는지 살펴보는 대신 저출생을 페미니즘 탓으로 돌리고 2) 건전한 교제의 전제가 평등한 주체들이라는 점을 간과한 데다 3) 페미니즘을 성평등으로 나아가기 위한 관점과 운동이 아닌 정치적 수단으로 인식합니다. 4) 결과적으로 예비 대선주자로서 출처도 알 수 없는 '그런 주장'에 힘을 실어준 셈이 됐습니다.
'건강한 페미니즘'이 왜 문제냐면요…
'건강한 페미니즘'을 꺼내든 이는 젠더 권력을 누리고 있는 남성입니다. 권력자 입장에서 건강하지 않은 페미니즘은 인정할 수 없다는 의지의 표명이기에 이 발언은 위험합니다. "독립운동을 하려면 건강한 독립운동을 해야지…"라는 말처럼 들리는 건 허스토리뿐만이 아닐 겁니다.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는 대선 주자들의 성평등 의식 부재를 지적하며 특히 윤 전 총장의 건강한 페미니즘론을 이렇게 비판했어요. "사상과 이념의 정치적 올바름을 국가가 판단하겠다는 검열의지인데, 이런 의지의 천명자가 지닌 페미니즘에 대한 이해는 빈약하기 그지없다." (→'대선 후보들의 성평등 철학을 듣고 싶다' 칼럼 전문 읽기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1081011030005420)
'내가 인정할 수 있는 페미니즘을 하라'는 남성들 목소리는 한 둘이 아닙니다. "정상적인 페미니즘이라고 할 수 없는 것도 있다" (신지호 윤석열 캠프 정무실장), "정의당은 허울뿐인 '가짜 페미니즘'"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 "논란의 핵심은 '남혐 용어 사용'과 래디컬(급진적)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에 있다"(양준우 국민의힘 대변인), "부정적인 의미로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를 기사에 사용할 땐 '급진 페미니스트'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조선일보 사내 공지) 등 진짜와 가짜, 정상과 비정상, 긍정과 부정으로 페미니즘을 끊임없이 구분합니다. 저마다 잣대에 맞는 페미니즘이 있으면 인정하겠다는 뜻일까요? 오히려 이 잣대를 들이밀며 모든 페미니즘에 부정적 의미를 덧씌울 가능성이 큽니다. 예술사학자 이라영은 이처럼 진짜 혹은 진정한에 대한 집착이 "누구도 진짜가 아니도록 만들기 위해서"('진짜 페미니스트는 없다')라고 지적합니다.
페미니즘을 제대로 알고 있나요
올바른 페미니즘을 검열할 수 있다는 시각 자체도 문제지만, 그 바탕에 페미니즘 의미와 역사에 대한 무지가 깔려 있다는 것도 절망적입니다. 한국사회가 성평등까지 나아갈 길이 아직 멀다는 현실에는 귀를 막은 채 말이에요. '여성도 남성과 같은 인간이다'라는 데에서 출발한 페미니즘은 다양한 갈래로 발전해 왔습니다. 앞선 운동과 이론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요. 안티 페미니스트들은 이런 맥락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여성가족부, 여성단체, 여성학자, 집회에 나선 여성, 온라인 커뮤니티 등 모두가 '잘못된 한국의 페미니즘'이 되는 까닭입니다.
(→김호기 교수가 설명한 페미니즘, 자세하게 읽고 싶다면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0112922400001452)
여성의 목소리를 들을 준비는 돼 있나
마치 '건강한' '급진주의가 아닌' '진짜' 페미니즘이라면 받아들여주겠다는 메시지를 보내는 이들은 여성의 삶에 응답할 준비도 돼 있는 거겠죠? 불법촬영 범죄, 노동시장의 성별 격차, 일과 가족 돌봄의 기로에서 매일 같이 고민하는 삶 말이에요. 최문선 한국일보 정치부장은 2020 도쿄올림픽에서 미국 펜싱 남자대표팀 선수들이 성범죄자 선수와는 한 편에 설 수 없음을 보여 준 '분홍 마스크'에 페미니즘을 빗댑니다. 그리고 유력 정치인들에게 이 분홍 마스크를 쓸 용기가 있는지 묻습니다. "부당하게 차별당하지 않는 상태, 성폭력으로부터 안전한 상태에 겨우 이르려 할 뿐"인 분홍 마스크를 쓰지 못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이재명과 윤석열, 분홍 마스크를 쓸 용기' 칼럼 전문 읽기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1081019070003607)
건강하고 올바른 페미니즘을 가장 많이 고민하고 있는 건 페미니스트들이라는 사실을, 안티페미니스트들은 모를 겁니다. 혹시 방금 내가 한 말이 무의식 중에 체화된 여성혐오적 표현은 아니었을지, 또 다른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내포한 건 아닐지 고민하니까요. 그러나 완벽하지 않더라도 사회에 깊게 박힌 성차별주의를 없애는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는 모두 멋진 페미니스트 아닐까요? 그래서 허스토리는 제안합니다. 페미니즘에 대한 몰이해를 바탕으로 아직도 건강한 페미니즘과 건강하지 않은 페미니즘을 구분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이렇게 묻자고요. "페미니스트가 아니세요? 혹시 당신은 성차별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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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성별이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평등하다고 믿는 사람"을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는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2012년 12월 테드 강연을 엮은 책이에요. '페미니스트'라는 단어에 씌워진 고정관념을 걷어내야 하는 이유를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풀어냅니다. 이번주 뉴스레터는 페미니스트들이 생각하는 '페미니즘'의 정의를 여러분과 나누며 마감하려 해요. 페미니스트와 페미니즘은 '이름을 불러선 안 되는' 볼드모트가 아니니까요!
※ 본 뉴스레터는 2021년 8월 12일 출고된 지난 메일입니다. 기사 출고 시점에서 변동된 사항이 있을 수 있습니다. 뉴스레터 '허스토리'를 즉시 받아보기를 원하시면 한국일보에서 뉴스레터를 구독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