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추행 피해를 당한 해군 부사관이 정식 신고 후 사흘 만에 극단적 선택을 한 사건은 불과 석 달 전 일어난 ‘성추행 피해 공군 부사관 사망 사건’과 여러모로 닮았다. 두 사건 피해자들은 사건 발생 후 두 달여가 지난 시점에 세상을 등졌다. 이 기간 성폭력에 노출되고도 조직의 보호를 받기는커녕 회유와 은폐, 따돌림 등 2차 가해에 시달린 점도 같다.
국민적 공분이 일었던 공군 성추행 사건을 계기로 마련된 재발 방지책도 방패막이가 되지 못했다. 군 당국은 13일 “2차 가해와 은폐 축소 여부, 보고 체계 등을 철저히 수사하겠다”고 밝혔다. 해군 중앙수사대는 피해자 사망 당일인 12일 가해자의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경기 평택 2함대사령부 소속 A 중사가 강제추행을 당한 건 5월 27일. 인천 옹진군 인근 섬에 부임한 지 사흘 만이었다. 같은 부대 소속 B 상사는 식당에서 피해자와 점심식사를 하던 중 “손금을 봐주겠다”며 손을 잡았고, 부대 복귀 과정에서 A 중사의 거부에도 신체 접촉을 계속 시도했다.
A 중사는 당시 피해 사실을 주임상사에게 알렸지만 외부로 알려지는 건 원치 않아 정식 신고는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다 두 달여가 지난 8월 7일 마음을 바꿔 부대장에게 면담을 신청했다. B 상사의 지속된 괴롭힘이 이유였다.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이 13일 공개한, A 중사가 가족에게 보낸 문자메시지(3일)를 보면 “제가 일을 해야 하는데 (B 상사가) 자꾸 (업무에서) 배제했다. 스트레스를 받아선 안 될 것 같아 부대에 신고하려고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전날 유족과 면담한 하 의원은 “가해자가 A 중사의 인사도 받지 않고 왕따시키며 괴롭혔다”며 “같은 사무공간에서 두 달 반 정도 지속적인 2차 가해가 매일 있었다고 본다”고 말했다. 심지어 B 상사는 성추행을 사과하겠다며 식당으로 불러 술을 따르게 했고 이를 거부하자 “3년 동안 재수가 없을 것”이라며 막말까지 퍼부었다. 공군 부사관 사건 때에도 가해자는 성추행 신고를 하려는 피해자에게 “신고할 테면 해봐라”면서 적반하장 격으로 나왔다. 다만 공군 사건처럼 부대원들의 2차 가해 여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가해자ㆍ피해자 분리 조치는 정식 신고와 함께 70여 일 만인 8월 9일에야 이뤄졌다. 신고가 늦어진 탓도 있지만, 공군 사건에서 신고 2주 후에야 공간을 분리해 피해자 고통이 가중된 점을 반면교사로 삼지 못한 것이다. 피해자가 공론화를 꺼렸다 해도 사건을 최초 인지한 주임상사 재량으로 분리 조치는 할 수 있었다는 지적이다. 더구나 A 중사는 전입한 지 얼마 안 된 데다, 섬이라는 고립된 근무 특성상 가해자와 접촉할 여지는 훨씬 많았다. 하 의원은 “(신분) 노출이 안 됐으면 좋겠다는 피해자의 말을 아무런 보호조치가 필요 없는 것으로 과잉해석했다”고 비판했다.
피해자는 본인 희망에 따라 신고 당일 육상 부대로 전출됐다. 이 과정에서 성고충 전문상담관이 유선으로 8차례 상담했다고 해군은 설명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A 중사는 12일 오후 전출된 부대 숙소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정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해군이 피해자 보호를 명목으로 시행한 민간 국선변호사 선임 등 후속 조치는 결과적으로 ‘사후약방문’이 돼버렸다.
해군 측 대응도 소극적이었다. 해군은 이날 법령과 훈령의 충돌을 이유로 주임상사가 상부에 사건을 즉각 보고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군인의 지위복무에 관한 법은 ‘성범죄 사실을 알게 될 경우 즉시 상관에게 신고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부대관리훈령은 ‘피해자가 원할 경우 상담 내용을 신고하지 않을 수 있다’며 피해자 의사를 먼저 고려하기 때문이다. 해군 관계자는 “일선 부대에선 훈령을 우선시한다”고 설명했다.
주임상사는 “공론화 대신 주의조치를 해 달라”는 피해자의 요구대로 가해자를 불러 “행동거지를 조심하라”고 구두 경고한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면담 당시 피해자 관련 사항은 직접 언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상부 보고도 A 중사가 정식 신고(9일)를 결심한 이후 진행됐고, 부석종 해군참모총장과 서욱 국방부 장관은 피해자 사망 하루 전인 11일 최초 보고를 받았다.
사건을 미리 인지하지 못한 성고충상담관 역시 피해자의 진술을 전적으로 신뢰했다. 상담관은 신규 부임자 상담을 의무화한 규정에 따라 6월 30일 실시한 A 중사와의 통화에서 “과거 한 차례 근무했던 곳이고 군 경력도 10년이 넘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피해자의 말에 안심했다. 공군 부사관의 죽음을 초래한 실무진 늑장 보고와 수뇌부 지휘 공백이 이번에도 피해자 홀로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상황으로 내몬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