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암컷에게 가장 폭력적인 종

입력
2021.08.12 17:00
25면
아직도 진행 중인 3,000년 전 어느 강간의 밤



약 3,000년 전, 어느 날 밤 고대 로마의 한 귀족의 저택에서 젊은 여성이 강간당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유명한 ‘루크레티아의 강간’ 이야기다. 루크레티아는 기원전 6세기 로마 시대, 미모와 부덕으로 칭송을 받던 전설적 여성이다. 그녀가 왕가의 방탕아 타르퀴니우스에게 겁탈당하고 죽은 사건이 민중 봉기의 원인이 되었고 결국 로마 왕정이 폐지되었다고 한다.

위 그림은 16세기 르네상스 거장 티치아노가 80대의 완숙기에 그린 것이다. 화가 스스로 다른 작품들보다 더 많은 노력과 기술을 투자해 그렸다고 밝혔듯이, 세부 묘사에서 나타나는 뛰어난 기교가 압권이다. 티치아노의 특징인 화려한 색채와 관능적인 여성 누드도 눈길을 끈다. 어지럽게 얽힌 남녀 팔다리의 선이 창출하는 다이내믹한 구성 속에서 두 인물 사이의 심리 드라마가 전개되고 있다. 화면의 빛과 그림자의 극적 대비는 강간 현장의 긴박함과 폭력적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그림은 두 개의 섹션으로 구분된다. 하나는 폭력과 욕망을 상징하는 타르퀴니우스의 붉은색 옷과 그 뒤 어둡고 무겁게 드리워진 휘장, 다른 하나는 침대의 깨끗한 흰색 시트와 루크레티아의 빛나는 몸. 무방비 상태를 암시하는 듯 발가벗은 알몸의 루크레티아가 남자의 폭력에 처절하게 저항하고 있는 한편, 강한 물리적 힘과 권력을 가진 타르퀴니우스는 왼손으로 루크레티아의 오른팔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칼을 들고 그녀를 향해 격렬하게 돌진하며 위협하고 있다. 루크레티아의 눈에는 절망과 공포가 가득하고, 왼손은 필사적으로 남자의 가슴팍을 밀치고 있으며, 오른팔은 도움을 청하는 듯 어둠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여자를 보지 않고 딴 곳을 향하고 있는 남자의 시선은 그가 육체적 욕망에만 관심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강간범의 폭력은 그의 매서운 눈빛에서, 휘두르는 칼날의 반짝임에서, 핏빛 붉은 옷에서, 그녀의 은밀한 부분에 달려드는 남자의 다리 위치를 통해 표현되어 있다.

참혹한 죽음으로 이어진 고대 로마 시대 어느 강간의 밤은 진행 중이다. 여성에 대한 폭력적인 성범죄와 폭행, 살해는 인간의 역사에서 늘 있었다. 지금도 성인 여성에 대한 폭력뿐만 아니라 유아, 어린이 강간 및 성착취, 강간 후 살인, 피해자의 자살 사건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도대체 인간은 왜 이렇게 잔인한 것일까? 인간과 영장류의 진화를 연구하는 프랑스 고고인류학자 파스칼 피크는 인간이 암컷에게 가장 폭력적인 종이라는 흥미로운 연구 결과로 이 물음에 답한다.

일반적으로 포유류 중에는 수컷이 암컷에게 폭력적인 종이 많지 않다. 반면, 700만 년 공통의 조상으로부터 종 분화된 인간과 침팬지는 단지 살아남거나 먹고살기 위해 다른 종과 싸우는 여느 야생동물들의 본능과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른 폭력성을 공유하고 있다고 한다. 침팬지 수컷들은 집단적으로 이웃 무리에 침입해 상대 수컷이나 암컷을 깨물고 찢어 죽이기도 한다. 그러나 피크의 연구에 의하면, 난폭한 침팬지의 경우에도 본질적으로 강간과 암컷 살해는 드물다고 한다. 이에 비해 같은 종족에 대한 인간의 적의나 무자비한 폭력은 침팬지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강력하다. 특히, 피크는 여성에 대한 극단적 폭력과 빈번한 살해는 인간종에게서만 나타나는 특이한 현상이라고 말한다.

원인이 무엇일까? 일부 진화생물학자는 강간과 같은 남성의 행동이 종에 고유한 생물학적 특성으로서, 진화 초기에는 강간이 종의 번식 전략이었으며, 강간 행동이 점차 ‘남성 정신(male psyche)’으로 굳어졌다고 주장한다. 사실, 고대의 가장 흔한 형태의 결혼은 약탈과 강간에 의한 것이었다. 한편, 일군의 사회생물학자들은 폭력적인 남성 행동이 타고난 유전적 특성이나 전형적인 종의 적응이 아니며, 여성에 대한 폭력적 환경을 제공한 것은 가부장적 사회체제라고 반박한다. 개개 남성의 생물학적, 심리적 폭력성이 원인이라기보다는 남성 지배 사회의 가치관 속에서 어린 남성들이 사회화되었기 때문에 성폭력의 대물림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가부장제는 여성을 통제하기 위한 남성의 폭력을 수용하는 문화 규범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타히티나 아프리카 피그미족 사회같이 덜 가부장적인 문화권에서는 강간이 거의 없다. 이렇게 보면, 여성에 대한 폭력은 생물학적 본성이라기보다 사회문화적 문제에 가까워 보인다.

진화생물학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도 영장류의 한 종이므로, 영장류의 행동 관찰은 인간을 이해하는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인류학자들은 보노보 침팬지 집단에서는 수컷과 암컷이 매우 우호적인 관계 속에서 산다는 점과 암컷에 대한 폭력이나 살해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는 수컷이 지배하는 가부장적인 침팬지 무리와 달리, 보노보 사회가 나이 많은 암컷을 중심으로 한 모계 중심이며 암컷보다 힘이 센 수컷이 난동을 부릴 경우 암컷들이 힘을 합쳐 제압해 버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보노보 사회의 모습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남성에게 권력이 집중된 인간사회의 부권제, 혹은 가부장제가 여성을 억압하는 문화적 메커니즘이라는 것을 방증하는 게 아닐까?

지금 우리는 엄청난 사회경제적 격변과 그에 따른 가치관의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과거의 불평등을 극복하려는 여성주의 운동이 거세지고 있고, 이에 역주행하려는 페미니즘 백래시 현상도 집요하다. 요즘은 자신들이 유리한 쪽으로 페미니즘을 소비, 악용하려는 정치인들의 입까지 가세해 소모적인 '페미 vs. 반페미' 논쟁에 불을 지피고 있다. 그러나 남녀의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 반드시 건너야 할 갈등의 강이 아닌가.

암컷들과 짝이 아닌 친구로서의 관계가 좋은 수컷 개코원숭이들이 그렇지 않은 수컷 개코원숭이보다 오래 살 확률이 높다는 재미있는 연구 결과도 있다. 모두들 장수하고 싶어 한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도 보노보나 개코원숭이들처럼 좀 사이좋게, 그리고 평화롭게 살자!


김선지 작가·'그림 속 천문학' '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