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앞의 평등’을 외친 문재인 대통령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가석방엔 굳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 청와대는 가석방 결정 이틀째인 10일에도 “입장이 없다”고만 했다.
문 대통령은 ‘경제 회복 필요’와 ‘특별사면으로 재벌에게 특혜를 줄 수 없다는 원칙' 사이에서 고민하다 ‘가석방’이라는 절충안을 택했을 것이다. 문 대통령이 고도의 정치적 판단을 내렸다면, 그 배경을 설명하고 국민의 이해를 구해야 한다. 그러나 청와대는 법무부에 화살을 돌릴 뿐이다.
침묵하는 청와대의 논리는 '이 부회장 가석방은 법무부 가석방심사위원회가 결정했다'는 것이다. 이는 책임 회피다. 법리적으로 특별사면과 가석방은 다르지만 ‘특별한 이유로 수형자를 풀어 준다’는 본질은 같다. 문 대통령은 지난 대선에서 ‘뇌물ㆍ배임ㆍ횡령 등 5대 중대 부패 범죄에 대한 대통령 사면권을 제한하겠다’고 공약했다. '가석방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공약한 적 없다'고 한다면, 변명에 가까울 것이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재벌개혁위원장)는 10일 “문 대통령은 2015년 야당 의원 시절 재벌 총수에 대한 가석방에 반대했었다”며 “이 부회장 가석방은 이 정권의 또 다른 내로남불”이라고 꼬집었다.
이 부회장 가석방이 오로지 ‘법무부의 결정’이라는 설명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9명의 가석방심사위에는 법무부 강성국 차관(위원장), 구자현 검찰국장, 유병철 교정본부장, 윤웅장 범죄예방정책국장 등 정부 인사가 참여한다. 가석방 논의에 정부의 '의중'이 반영되는 구조라는 얘기다. 청와대가 최근 이 부회장 가석방 기류에 대한 보고를 받지 않은 것도 아니다.
대통령제하에서 청와대와 내각은 한몸이다. 청와대는 각 정부 부처를 사실상 지휘한다. 행정부 인사권도 청와대가 갖고 있다. 청와대 따로, 법무부 따로가 아니라는 얘기다.
이 부회장을 비롯해 역대 대기업 일가의 사면·가석방 이슈가 불거질 때마다 재계는 대통령을 찾아갔다. 대통령에게 최종 결정권이 있기 때문이다.
이 부회장 가석방 결정은 문재인 정부 지지자들을 실망시켰다. 진보진영에선 "촛불정신을 다시는 언급하지 말라"는 날선 비판이 쏟아진다. 이에 문 대통령이 육성으로 국민의 이해를 구하고 결자해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참여연대는 “문재인 정부는 삼성 재벌의 국정농단으로 정권을 잡았고, 공정경제를 경제정책 기조로 삼았다”며 “문 대통령은 이 부회장 가석방 허가에 분명한 입장을 밝히라”고 했다. 심상정 정의당 의원은 "국정과제 제1순위로 적폐청산을 내세웠던 문 대통령의 분명한 입장을 요구한다"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