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명가’ 이탈리아와 프랑스가 기상 이변으로 된서리를 맞았다. 올해 초부터 냉해와 가뭄, 폭우 등이 몰아치면서 포도 수확량이 급감했고, 그 결과 포도주 생산량이 사상 최저 수준으로 떨어지는 상황에 처했다. 기후변화 탓에 와인의 생명인 ‘맛’마저 바뀔 조짐이라 농가와 양조업자들의 시름도 깊어지는 모습이다.
9일(현지시간) 미국 일간 워싱턴포스트(WP) 등 외신에 따르면, 이탈리아 농민단체 콜디레티는 이날 “해수면 상승과 가뭄 등 기후변화로 농작물이 파괴되고 있다”며 올해 농업 분야에 10억 유로(약 1조3,500억 원) 이상의 피해가 예상된다고 밝혔다. 특히 ‘탄광 속 카나리아’로 불릴 만큼 기온에 민감한 와인용 포도는 직격탄을 맞은 작물 중 하나다. 이상 고온으로 이탈리아 남부에선 예년보다 포도 수확이 일주일 일찍 시작됐고, 폭우가 쏟아진 북부는 열흘가량 성장이 지연되고 있다는 게 콜디레티의 설명이다.
작황 부진은 와인량 감소로 이어진다. 최대 와인 생산국인 이탈리아의 올해 포도주 생산량 예상치는 4,400만∼4,700만 헥토리터(1헥토리터=100리터)인데, 이는 지난해보다 5~10% 줄어든 것이다. 1헥토리터는 표준 사이즈 와인 133병을 만들 수 있는 양이다.
세계 2위 와인 생산국이자 종주국인 프랑스도 예외는 아니다. 올 3월 대표적 와인 산지인 보르도, 부르고뉴, 론 등은 느닷없는 무더위로 한낮 기온이 영상 26도까지 오르는 바람에 포도나무가 일찍 개화했다. 그런데 일주일 뒤, 이례적 한파로 기온이 영하 6.7도까지 떨어져 서리가 농작물을 뒤덮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여름철엔 폭우마저 내려 곰팡이 피해까지 낳았다.
여파는 상당하다. 올해 프랑스 와인 생산량은 작년보다 24~30% 감소한 3,260만∼3,560만 헥토리터로 추산된다. 프랑스 농림부는 “파괴적 서리와 폭우 피해로 포도 수확량이 크게 줄었던 1977년에 필적할 것으로 보인다”고 내다봤다. 샴페인용 포도의 경우, 아예 예상 수확량의 절반 이상이 상했다는 게 생산자들의 호소다. WP는 “극한 기후로 인한 생산량 급감은 이미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미국의 높은 관세에 맞서 싸우는 와인 산업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분석했다.
다만 이상 기후가 당장 내년 포도주 값 상승으로 이어지진 않을 전망이다. 통상 와인 생산자들은 공급 감소 또는 수요 급증 상황을 대비해 수년간 생산량을 비축해두기 때문이다. 문제는 기후변화가 한두 해 안엔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발 빠르게 대처하지 못한다면 매년 같은 현상이 빚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독일 공영방송 도이체벨레는 세계기상협회(WWA)를 인용해 “기온이 올라 과수의 생장이 빨라지면서 극심한 서리 피해를 입을 확률이 60% 높아졌다”고 전했다.
기상이변으로 바뀐 ‘수확 방정식’은 맛마저 변화시킬 듯하다. 와인 맛은 주재료인 포도가 얼마나 잘 익었느냐, 언제 수확했느냐에 크게 좌우된다. 포도는 익을수록 당도가 높아진다. 그러나 너무 많이 익으면 신선함의 지표인 산도(酸度)가 떨어진다. 이 때문에 유명 양조업체들은 산도와 당도가 적정한 시점을 정밀하게 계산해 포도를 수확해 왔다. 영국 시사주간 이코노미스트는 “이상 고온 탓에 수확 예측이 한층 복잡해졌다”며 “기후변화가 와인 맛에도 영향을 미치는 셈”이라고 설명했다.